정석영 PD, 감정의 다큐멘터리를 쓰다…'당신에게 말을 거는 책' 출간

곽성일 기자 2025. 7. 10.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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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말을 거는 책 입체 표지.
"예술작품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말을 걸어왔다."

30여 년간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정석영 PD는 그렇게 말했다. 수많은 장면과 얼굴을 스쳐 지나온 그의 기억 속에는, 빛과 어둠, 고통과 존엄, 슬픔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놓여 있었다. 이제 그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펜을 들었다. 『당신에게 말을 거는 책』(에스앤아이팩토리 刊)은 화면 대신 문장으로 기록한 인생의 또 다른 다큐멘터리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나 현장 보고서가 아니다. 한 다큐멘터리스트가 예술과 삶, 기억과 감정 사이에서 길어 올린 성찰의 기록이자, 때론 말보다 강한 침묵의 무게를 되새기는 일종의 '감정의 에세이'다. 프랑스 파리부터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네덜란드 안트베르펜까지, 책 속의 장면은 저자의 카메라가 지나간 시간만큼이나 다채롭고 밀도 있다.

△빈곤의 눈동자에서 예술의 황홀까지

책의 시작은 늘 현장이었다. 가난한 마을의 아이들이 마신 물 한 모금, 오스트리아 묘역에서 만난 작곡가의 이름, 극장 한복판에서 마주친 백조의 군무. 정석영 PD는 그 모든 장면을 감정의 여운으로 풀어냈다. 특히 아프리카의 오염된 물을 마시던 아이들과의 인터뷰는 그를 '카메라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고, 빈곤을 소비하는 시선의 잔혹함을 마주하게 했다. 그는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함께 담아내는 것이 진짜 다큐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 책은 예술을 보는 한 개인의 내밀한 기록이기도 하다. 클래식 음악의 감정 곡선, 발레 군무의 숨결, 그림 한 점에 깃든 시대의 공기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 역시 저자와 함께 묘지에서 음악을 듣고, 미술관에서 도시를 걷게 된다. '예술은 나를 멈춰 세우는 힘'이라고 말하는 그는, 고흐와 렘브란트의 자화상 앞에서, 또는 쇼팽의 묘 앞에서 자신의 시간과 감정을 정리해 나간다.

△다큐멘터리의 기억, 감정의 글쓰기로 번역하다

『당신에게 말을 거는 책』은 크게 네 장면(Scene)으로 구성된다. 1장은 음악과 무용, 공연예술을 중심으로 감정을 깨우는 예술의 힘을 조명하고, 2장은 미술관과 도시 공간을 통해 시공간을 관통하는 예술의 궤적을 따라간다. 3장은 현장의 기록자이자 질문자로서의 '다큐멘터리스트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4장에서는 죽음과 이별, 묘지와 침묵 속에서 삶을 되새긴다. 각 장면은 하나의 챕터이면서도, 독자의 감정선에 따라 순서 없이 읽어도 좋을 만큼 독립적이기도 하다.

특히 '32개의 튀튀, 하나의 호흡'에서는 러시아 발레단의 고전 무대를 마치 무용수처럼 세밀한 시선으로 해부하며, '시간의 자화상'에서는 렘브란트 자화상 한 점이 내포한 청춘의 야망과 두려움을 섬세하게 분석한다. '부서진 비석에서 찾은 역사'에서는 하와이 한인 이민자의 묘비를 통해 '기억되지 않는 역사'의 소중함을, '페르 라셰즈'에서는 예술가들이 남긴 마지막 흔적을 조용히 어루만진다.

"지금 말하고 싶다, 이 이야기 들어줄 수 있나요?"

정석영 PD는 자신을 "조용한 카메라맨이자 수다스러운 관찰자"라고 소개한다. 그는 서울시립미술관 도슨트와 시민 큐레이터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어교원 자격증도 따며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를 확장해왔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만난 삶의 순간들, 예술과 세계를 바라보는 감정의 프레임을 담기 위해, 그는 다시 무언가를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이렇게 속삭인다.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이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당신에게 말을 거는 책』은 그 잊지 않기 위한 시도의 하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던 사람,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자 하는 작가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긴 한 권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