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위해 망명 선택한, 비운의 독립운동가들을 찾아서

차형석 기자 2025. 7. 1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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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을 새로 펴냈다. ‘독립운동사 대중화’를 위해서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서 교수를 자택에서 만났다.

최근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77)가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개정판을 출간했다. 2001년 초판이 나온 이 책은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무척 의미 있는 단행본이다. 신흥무관학교, 이회영 일가와 이상룡 등 경북 안동 인사들의 독립운동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된 책이다. 개정판을 내자는 역사비평사의 제안을 받고, 서 교수는 초판 이후 밝혀진 역사적 사실을 추가하고, 젊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문장을 다듬었다. ‘독립운동사 대중화’를 위해서다.

서 교수에 따르면, 한국처럼 강점당한 순간부터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된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중에서도 서간도에 위치한 해외 독립운동 기지인 신흥무관학교와 당대 명문가 이회영 일가의 삶은 여러 차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름난 가문 중에서 독립을 위해 해외로 망명한 사례는 이회영 6형제가 유일했다. 이회영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아들로, 여섯 형제 중 넷째였다. 그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신흥무관학교 건립을 주도했다. 둘째인 이석영은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 큰 부를 이루었는데, 전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건립에 쏟아부었다. 말년에는 두부 비지로 연명할 만큼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다섯째 이시영은 해방 후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서 교수는 과거 군부독재에 맞서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10개월여 수감되었다. 2013년 서울고등법원은 서 교수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옥살이한 지 39년 만의 일이었다. 지난 6월16일 서 교수를 자택에서 만났다.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과거 군부독재에 맞서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시사IN 이명익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을 쓴 이유는?

신흥무관학교를 빼고는 1910년대 독립운동을 얘기할 수 없다. 일제 때 국내에서는 지하투쟁 말고는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독립투쟁을 하기 어려웠다. 일제강점하에서 당시 한국의 망명자들은 서간도, 북간도, 중국 ‘관내’(산해관 안쪽), 시베리아, 일본, 미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특히 서간도는 한국인이 많이 거주한 곳으로, 신흥무관학교가 중심이었다. 이 학교의 배경에는 동삼성(만주) 한국인 혁명 결사인 경학사가 있다고 본다. 양자의 주요 인물들이 겹친다. 1915년께 서간도에는 6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강력한 자치 조직 부민단이 생겨나고, 3·1운동 직후에는 6만명가량을 대상으로 한 한족회가 형성된다. 신흥무관학교와 경학사-부민단-한족회의 전체 상을 그려 1910년대 독립운동이 어떻게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신흥무관학교를 간략히 소개한다면?

신흥무관학교에서는 무관 교육과 중등교육을 동시에 실시했다. 특히 3·1운동 직후에는 대단했다.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명성이 높아, 청년·학생들이 ‘거기에 가서 무관 교육을 배워 싸우자’는 분위기가 강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홍범도·김좌진 장군의 부대에 들어가 청산리전쟁에도 참여했다. 1919년 11월10일 의열단을 결성한 13명 중 8명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상해임시정부 국무령·주석을 역임한 이동녕,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국민대표회의 의장을 한 김동삼 등도 신흥무관학교 일을 주도적으로 했던 이들이다. 1940년 광복군이 조직될 때, 지청천·김원봉·이범석·김학규 등 광복군의 주요 간부 4명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도 그렇다. 신흥무관학교가 우리 독립운동에 남긴 족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빼놓고는 1910년대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수 없고, 1919년 3·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여러 방면에서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2001년 책을 쓸 당시 신흥무관학교는 잘 알려지지 않았나?

그렇다. 당시 몇 분이 글에서 신흥무관학교에 대해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관련한 논문 한 편이 있는 정도였다. 신흥무관학교를 다룬 논문이나 단행본은 거의 없었다. 역사학자로서 나는 운이 좋았다. 옛 국가보훈처가 중국 당안관에서 자료를 구해왔는데, 신흥무관학교 관련 기록이 꽤 많았다. (1919년까지 신흥무관학교 부근에 살아 신흥무관학교에 관해 생생하게 기억했던) 이태형이 쓴 수기도 짧지만 굉장히 알찬 자료로 큰 도움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의 주역들인 이회영, 이석영, 김동삼(왼쪽부터). ⓒ이회영기념관 제공, ⓒ역사비평사 제공

이회영·이석영 등 6형제에 대한 기록은 어떤가?

이석영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데 자금을 댔다. 절대적인 공로자다. 그런데 이석영과 관련된 자료가 많지 않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관 이관직이 쓴 짧은 글에 전적으로 의존했다고 책에도 썼다.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아 책에 초상화를 실을 수밖에 없었다. 이회영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일찍 노비를 해방시켰다. 다른 집 종들에게 높임말을 썼다. 해방된 노비 중 한 명은 함께 만주로 갔다. 그를 동지로서 대접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가 오랫동안 인재를 키울 수 있었던 데에는 이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이석영, 이회영 등은 자신들을 내세우지 않았다. ‘돈도 내고 우리가 앞장섰으니까 감투를 써야겠다’, 이런 게 전혀 없었다. 이회영이라는 사람은 그런 걸 피하는 사람이었고, 자기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기록이 별로 없다.

신흥무관학교는 언제 해산했나?

연구자마다 의견이 다른데 나는 1920년 가을~겨울에 와해되었다고 본다. 1919년에 마적떼가 신흥무관학교를 습격해서 윤기섭 교감 등을 잡아갔다. 배후에 일제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윤치국 사건’이 있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었는데,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그를 일제의 밀정으로 의심해 구타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두 사건이 신흥무관학교가 와해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해외로 망명했던 여성들의 독립운동이 더욱더 주목받았으면 한다고 서문에 썼는데.

신흥무관학교 연구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사료가 바로 세 여성이 쓴 수기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허은, 김동삼의 맏며느리 이해동이 남긴 기록이다. 보통 독립운동을 연구한다고 하면 대개 전쟁을 어떤 식으로 했다, 우리가 이겼다 패배했다는 식으로 연구하게 마련인데, 이 세 분의 눈물 나는 수기는 이렇게 독립운동을 어렵게 했구나 하는 점을 알 수 있게 했다. 굉장한 자료이고, 내용도 감동적이다. 이은숙은 독립운동의 정신이 대단한 분이었다. 남편 이회영과 아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옥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수기에는 남편이나 자식을 원망하는 말이 전혀 없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여러 차례 눈시울이 뜨거웠다고 했다. 독자로서 이 책의 마지막 문장(‘김동삼의 시신은 화장 후 한강에 뿌려졌다’)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만주의 호랑이’라고 불렸던 독립투사가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니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치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달라”고 했다. 사실을 기술하는 마지막 문장에서 감정이 전해지는 듯했다. 필자로서 어느 대목에서 뭉클했나?

서간도는 추위가 지독하고, 풍토병이 심했던 곳이다. 당시의 글을 보면 풍토병이 돌아 아이들이 죽어 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독립운동을 하러 간 이들이 이런 고통을 겪으며 죽어가는 대목에서 눈물이 나더라. 김동삼은 큰아들이 결혼한 다음 해에 부인을 보고는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그가 하얼빈에서 잡혀 있을 때, 아홉 살 딸 등과 면회를 했다. 그는 거친 큰 손으로 처음 보는 딸의 손을 어루만지며 오래오래 딸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 장면이 슬펐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이 서간도 생활에서부터 해방 직후까지를 기록한 <서간도 시종기> 육필 원고. ⓒ이회영기념관

윤석열 정부 때 육사 교내에 있는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이회영 등의 흉상을 옮기려고 했다(대선 직전 흉상 이전 계획은 철회되었다). 다섯 명 모두 신흥무관학교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 그때 마음이 남달랐겠다.

어이없고, 멍청한 짓이다. 세상에 그렇게 어리석은 짓이 어디에 있나? 동상 이전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그걸로 이득을 하나도 못 볼 거라고 봤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임하던 2021년, 카자흐스탄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올 때 꽤 크게 보도되었다. 윤석열이나 누군가는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 거 아닌가. 그게 직접적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홍범도 장군은 국민적 지지를 받은 인물이다. 그렇게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었다.

현대사 전공 역사학자로서 12·3 내란을 어떻게 봤나?

하도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대면서 계엄을 선포하길래 ‘정말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구나’ 싶었다. 언론에서 이전 비상계엄과 관련해 보도를 하는데, ‘현대사에 너무 어둡구나’ 싶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었고, 한 열흘 지나니까 정확해지더라. 국회 해산 문제를 다르게 설명하더라. 박정희가 1972년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국회를 해산한다’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건 헌법을 위반하는 행위다. 또 ‘헌법의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효력이 정지된 헌법 조항의 기능은 비상 국무회의가 수행한다’고 했다. 범법 행위고 내란 행위다. 당시 군대가 국회 문을 막았고, 국회의원들이 들어갈 방법이 없어서 저절로 해산되었다. 불법 폭력으로 국회를 해산한 것인데, 마치 저절로 해산된 것처럼 초반에 보도되었다.

그 이후 대선까지 6개월에 대해선?

처음에는 압도적 다수가 ‘내란 행위이고, 윤석열을 탄핵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대형 교회를 포함한 보수 개신교가 전국을 누비면서 그런 여론이 주춤한 걸로 보인다. 무서운 현상이다. 선거 기간 중에 ‘박정희를 지지한다’는 식의 말을 특정 지역에 가서 많이 하던데. 유신체제는 한국인이 겪은 가장 나쁜 정치체제다. 박정희는 비상사태가 아닌데도 유신체제를 지키기 위해 긴급조치로 통치한 거다. 1975년 5월13일에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고 죽을 때까지 해제하지 않았다. 1978∼1979년에 가면 한국 경제가 멍이 들어가는데도 긴급조치로 모든 정보를 차단하니까 국민들이 그 내용을 전혀 몰랐던 거다.

내란 이후를 지켜보며 현대사와 결합된 민주주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국민들의 교양, 지식을 튼튼하게 해놓으면 정말 이상한 주장은 저절로 동화될 수밖에 없을 텐데.

나는 역사 연구에서 실사구시를 계속 강조해왔다. 무엇이든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이렇게 쓰는 게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좋게 좋게 써주는 건 있을 수가 없다. 실사구시가 필요하다. 나는 진보세력과 오래 같이해온 사람이지만 진보세력을 믿기 어렵다. 사실을 꼼꼼히 따지고,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관리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사실에 근거해 일을 해야 한다. ‘우리끼리’ 적당히 넘어가려 해선 안 된다. 나는 나쁜 야당이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협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야당이 너무 나쁜 방향으로 가는 듯해 참 걱정이 된다.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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