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다크투어리즘’…과거 위무하고, 오늘 위안받는, 내일 향한 천도제[투어테인먼트]

강석봉 기자 2025. 7. 10.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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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민 살아쪄”. 그렇다. 살면 살아진다. 외로운 대지에 4·3민중항쟁의 깃발이 날리면, 유채꽃마저 피에 젖었다. 제주도민의 피다. 그 틈을 살아내도 그들에겐 ‘더 독한 날’이 이어졌다. 가해자가 떵떵이며 뇌까리는, 그것이 용인되는 희한한 세상이었다. 당신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뭍에서는 ‘폭삭, 속았다’고 오해하지만, 제주는 스스로 ‘폭삭, 속았다(수고했다)’고 위무한다. 이녁의 땅이라 폄훼된 그곳 ‘제주’, 꽃잎마저 시든 대지에선 한국전쟁이 끝났어도 총 7년 동안 최대 8만 명의 인종청소가 자행됐다.

잠들지 않는 남도, 그 피 내 아린 그곳을 향해 떠난다. ‘다크투어리즘’ 여행, 한반도가 제주의 원혼에 화해를 청한다. 제주 사람은 서운해 사무치고, 뭍사람은 미안해 사무치는 ‘그때그얘기’. 그 힘든 일을 제주특별자치도관광협회가 시작했다.

용기 한번 내보면 어떨까. 제주 다크투어리즘은 흔한 제주와 다르다. 새롭게 알게 될, 이 여행길을 통해 우리 삶에게 던질 거침없는 한마디.

“졸아붙지 마. 당신은 푸지게 살 수 있어.”

큰넓궤
- 주소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90 일대


큰넓궤 가는 도로 옆 이정표. 사진|강석봉 기자


한산한 안덕면 도로 옆 200m 산길을 들어서야 만날 수 있다. 초입은 큰넓궤를 알리지만 이내 돌무덤과 잡초, 길조차 찾을 수 없는 숲이 탐방객의 발길을 잡는다. 걷기도 쉽지 않다.

큰넓궤는 중산간 초토화 작전으로 동광리 마을의 120여 명의 주민이 1948년 11월 중순 이후 2개월가량 피신해 머문 곳이다. 당시 깨진 그릇 조각과 방호벽을 쌓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큰넓궤 가는 숲길. 사진|강석봉 기자


동광리의 큰넓궤와 도엣궤는 동광목장 안에 있는 용암동굴이다. 이웃이 죽임을 당하는데, 동광리 주민들이 마을서 살아낼 재간이 없었다. 이 굴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날 토벌대는 동광리 무동이왓 주민들을 전부 모이게 한 후 그중 10명을 거리낌 없이 총살하고 간장리를 불태웠다. 그 후 주민들은 마을 인근 여기저기에서 숨어 사는 처지가 됐다. 처음엔 도너리오름 곶자왈에 숨어 살았다.

큰넓게와 연결된 안덕면의 한적한 도로. 사진|강석봉 기자


그러다 큰넓궤를 찾아냈고, 폭설이 쏟아지자 그 참에 이 굴로 거처를 옮겼다. 큰넓궤는 험했지만 넓었고, 사람들이 숨어 살기에 그나마 적당했다. 모여든 사람은 120여 명에 이르렀다. 어린아이·노인 등 40~50명은 이 굴에 살았고, 청년들은 주변 야산이나 근처의 작은 굴에 몸을 숨겼다. 토벌대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청년들은 망을 보거나 식량·물 등을 지고 날랐다.

큰넓궤. 사진제공|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하지만 토벌대는 끝내 그곳을 찾아냈다. 청년들은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굴 안으로 대피시킨 후 이불 솜 등을 모아 고춧가루와 함께 쌓아 놓고 불을 피웠다. 매운 연기를 부채로 부쳐 토벌대의 진입을 막았다. 최루탄 역할을 한 셈이다.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토벌대는 밖에서 총만 쏘아댈 뿐 들어서진 못했다. 결국 토벌대는 굴 입구에 돌을 쌓아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은 다음 철수했다. 토벌대가 철수한 후 근처에 숨어 있던 청년들이 굴 입구에 쌓아놓은 돌을 치우고 주민들을 탈출시켰다.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피했지만, 뒤쫓던 토벌대에 잡혀 영실 인근 볼레오름 지경에서 총살되거나 서귀포로 끌려갔다. 이후 이들 역시 정방폭포 등에서 학살됐다.

섯알오름 학살터
- 주소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1618


섯알오름 학살 추모비. 고무신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게양된 태극기는 조기로 예를 갖췄다. 사진|강석봉 기자


한국전쟁 발발 직후 모슬포를 중심으로 서부 지역의 주민들이 집단 학살된 장소다. 일제강점기 군용기지였던 알뜨르비행장에서 약 400m 근처다.

섯알오름 학살 추모비. 사진|강석봉 기자


정상에는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고사포 진지, 남쪽 기슭에는 제주 4·3사건 당시 학살터가 있다. 당시 130여 명의 주민이 한꺼번에 총살됐다. 서슬 퍼런 시절이라 단 한 구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가 6년 만에 유해를 거뒀다. 이 뒤엉킨 유해가 ‘백조일손’을 결성하게 된 이유가 됐다.

섯알오름 학살 추모비. 태극기가 조기로 달려있다. 사진|강석봉 기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내무부 치안국에서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을 압살했던 예비검속법을 악용해 일을 벌였다. 옷만 갈아입은 일경은 억울한 죽음을 총연출했고 역사를 쳇바퀴로 만들었다.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 6월 30일 구금자 처형 등의 내용을 담은 전문이 제주도 내의 각 경찰서에 하달됐다. 이에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 344명을 예비검속해 관리했다. 말은 예비검속이지만 강제검속이었다.

이들은 7월16일 63명을 국군에 인계했고,1차로 이 중 20명을 섯알오름에서 학살했다. 이때부터 주된 학살자는 육군본부 방첩대(CIC)와 해병대다. 2차로 8월 20일에 한림 경찰서의 수용자 60명을 학살하고 다시 같은 날 모슬포 경찰서 수용자 130명을 학살했다. 모두 210명을 법적인 절차 없이 집단 학살해 일부는 바다에 버리고 일부는 암매장한 비극의 현장이다. 이곳은 뻔질나게 사람 죽이는 것이 일상이 된 당시 제주 유일의 학살터였다.

이때 죽임을 당한 유해 일부는 지금의 ‘갯거리오름’ 자락의 ‘만벵디 공동장지(금악리 2754번지)’에 63구의 유해가 안장됐다. 만벵디유족회에 의해서다.

벵디는 제주어로 넓은 들을, 만(滿)은 가득하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북망산천 가는 곳으로 비유되는 만벵디는 비가 내리면 물이 많이 고인다는 의미를 지닌 장소로 전해온다. 희생자추모비가 있는 탄약터 웅덩이엔 7월의 폭염 속에서도 그렇게 물이 고여있다.

이 사건의 전개 과정을 보면, 최근 알려진내란 사건 뉴스에도 오버랩되는 내용이 있어 소름이 돋는다. 실제 이곳은 물이 아니라 그때 희생자들의 살이 흘러 머문 곳이다.

대전 열방중앙교회(목사 김성진, 사진 정면)에서 탐방 모임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김성진 목사


백조일손역사관
- 주소 제주도 송악관광로143번길 170-50


백조일손역사관. 사진|강석봉 기자


섯알오름에서 집단 학살된 희생자를 추모하고 알리는 역사 공간이다. 앞서 섯알오름에서 130여 명의 주민이 한꺼번에 총살됐고, 6년 만에 유해를 거두었다. 유골이 서로 뒤엉켜 한 몸이 된 것은 두말이 필요 없다. 그것을 본 유족들이 이젠 남이 아니라 한 가족이라고 다짐했다.

백조일손역사관. 사진|강석봉 기자


유족들은 유해를 합동 안장했고, ‘132명의 조상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켜 하나가 됐으니 후손들 모두 한 자손’이라는 의미를 담아 ‘백조일손지지’라고 묘역의 이름을 지었다. 역사관 내에는 발굴 당시 현장에서 나온 신발창, 탄피, 총알 구멍 난 옷 등이 보관 중이다. 학살 과정을 재현한 샌드애니메이션 등을 보여준다.

이곳을 자가용으로 방문할 때 주의할 점은, 도로에서 빠져들어서야 하는 진입로가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1차로란 점이다. 마주 오는 앞차를 잘 살펴야 한다. 역사관 앞 주차공간은 넓다.

백조일손역사관. 사진|강석봉 기자


정방폭포 소남머리
- 주소 제주도 서귀포시 칠십리로214번길 37


소남머리. 사진|강석봉 기자


정방폭포는 천제연폭포, 천지연폭포와 더불어 제주도 3대 폭포다. 높이 23m, 너비 8m에 깊이 5m에 달하며, 국내에선 유일하게 뭍에서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다. 햇빛이 비쳐 은하수 빛깔로 변하는 정방 폭포는 아름답지만 정방폭포 ‘소남머리’는 비애가 차고 넘치는 장소다. 지금은 주민의 휴식처로 개발돼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소남머리 내려가는 계단. 사진|강석봉 기자


소남머리는 4·3사건 당시 정보과에서 취조받은 주민 중, 즉결처형 대상자들 대부분이 희생된 곳이다. 흔히 정방폭포에서 희생당했다고 하는 대부분이 정방폭포 상당과 이어지는 이곳에서 총살당했다.

‘소남머리’란 지명의 유래는 동산에 소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서귀중학교 학생이었던 송세종씨는 “그때 당시 어디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도망가다가 절벽으로 떨어졌는데 노송에 걸렸어. 그 여자가 임신하고 있었지. 떨어지니까 군인들이, 이건 하늘이 도운 사람이라고 해서 살려줬어. 사람 두 번 죽인다는 것은 없으니까. 나도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이라고 회고했다.

당시 서귀리 및 서귀면, 중문면 일대뿐만 아니라 남원면, 안덕면, 대정면, 표선면 주민에 이르기까지, 정방폭포 희생자들은 산남 지역 전체에 이른다.

소남머리. 사진|강석봉 기자


■ 제주 다크투어리즘
o 투어기간 2025. 3. ~ 10.
o 제주 다크투어리즘 모바일 스탬프 투어
o 유적지 제주 4·3 및 항일 관련)
o 모바일스탬프 투어 어플리케이션(App) 활용 스탬프 투어
o 실내·야외 QR 코드(포맥스) 및 인증스탬프


강석봉 기자 ks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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