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은 맑고, 말투는 공손한… 선해 보여 더 무서운 ‘빌런’들

칼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던 ‘전통적 악역’의 시대는 저물었다. 최근 드라마와 영화 속에선 눈빛은 맑고 말투는 공손한, 어디선가 본 듯한 ‘착한 얼굴’들이 악행(惡行)을 저지른다. 관객은 이들의 반전에 배신감을 느끼기는커녕, 설렘과 몰입을 경험한다. ‘선해 보여 더 무섭다’는 말이야말로, 현실에 더 부합하지 않는가.
착하고 다정한 이미지로 오랜 시간 대중의 신뢰를 쌓아온 배우들이 최근 잇따라 악역으로 변신하고 있다. 세상 순한 얼굴로 이들이 저지르는 잔혹한 행동은 단순한 반전 효과를 넘어, 악의 서사에 새로운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광장’에서 폭력 조직 후계자 ‘구준모’ 역을 맡은 공명(31)은 대표적 사례다. 이전까지 ‘멜로가 체질’(2019), ‘행복의 진수’(2020) 등에서 착한 연하남과 선한 남사친 역할로 친숙한 얼굴. 그런 그가 ‘광장’에서는 광기와 유약함을 동시에 지닌 철없는 사이코패스로 등장한다. 잔혹한 행동도 서슴지 않지만, 눈앞의 강자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 ‘강약약강’ 캐릭터. 공명은 지난달 제작 발표회에서 “처음 맡는 악역이라 저조차 낯설었다. 철없는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배우 박은빈(32)도 최근 악역으로 손에 처음 피를 묻혔다. 지난 3월 공개된 디즈니+ 메디컬 스릴러 ‘하이퍼나이프’에서 사이코패스 천재 외과의사 ‘정세옥’을 연기한 그는 사람을 살리는 손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라면 누구든 제거하는 인물. 1996년 아역으로 데뷔한 박은빈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2022)에서 순박한 영혼에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 역으로 따뜻한 이미지를 각인시켰기에, 그의 변신은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이돌 그룹 엑소(EXO) 출신 도경수(32) 역시 올해 첫 악역 연기에 도전한다. 하반기 공개 예정인 디즈니+ 시리즈 ‘조각도시’에서 그는 흉악 범죄를 설계하는 ‘요한’ 역을 맡아 배우 지창욱(38)과 복수극을 펼친다. ‘맑은 눈의 광인’이라는 제작진의 설명처럼, 평소 순수한 이미지였던 도경수의 얼굴 위에 악이 덧입혀진다. 그간 영화 ‘형’(2016)에서 유도의 꿈을 포기한 시각장애 동생, ‘신과함께’ 시리즈에서는 애처로운 관심병사 ‘원 일병’을 연기하며 순한 남자의 전형을 보여줬던 그가 악의 대명사로 변신하는 것이다.
선한 이미지의 배우들이 연기하는 악역은 관객에게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심리적 긴장을 동반한 감정적 충돌을 만들어낸다. 전문가들은 익숙한 얼굴이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할 때, 관객은 캐릭터의 선악 경계에서 불안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낀다고 설명한다. 하재근 대중문화 평론가는 “‘맑은 얼굴의 빌런’은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더 깊고 복잡한 캐릭터의 세계로 이어지는 열쇠가 된다”며 “반전으로부터 나오는 입체감에 더욱 몰입이 되면서 선한 이미지의 배우들에게 악역이 하나의 도전이 되고 있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땅속 묻은 김치가 맛있는 이유… 버번 위스키에 적용하면 어떨까
- 하루 163명만 입산… 자신만만 올랐다가 겸손해져 하산하는 ‘신들의 안식처’
- [경제계 인사] 다이닝브랜즈그룹
- “눈보라도 트럼프도 우리의 일상을 막을 순 없어”
- 부정청약 논란에 ‘아들 가정사’ 꺼낸 이혜훈
- 다주택자 중과세 부활한다
- 서울 초등학교도 ‘입학생 0명’ 쇼크
- [바로잡습니다] 1월 23일자 A25면 “여당도 민주당, 야당도 민주당…” 제목의 뉴스 읽기에서 외
- 장남과 파경 상태라던 며느리, 시댁 ‘로또 청약’ 맞춰 전출입 반복
- 이혜훈 “보좌진 폭언 당일 사과” 당사자는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