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통해 삶을 묻다] 명분이 굳어지면 우리로부터 멀어지죠

하영란 기자 2025. 7. 9.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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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효 시인의 시 ‘명분’
전부를 몰라도 필요한 생각들은 쌓여가고
언제든 끝을 열어두면 나머지는 시작되죠
정영효 시인

우리는 살아가면서 명분(名分)을 중요시 여긴다. 명분 때문에 싸우는 일도 있다. 명분은 각각의 이름이나 신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군신, 부자, 부부 등 구별된 사이에 서로가 지켜야 할 도덕상의 일을 이른다. 또 다른 뜻은 일을 꾀할 때 내세우는 구실이나 이유 따위를 말한다.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다'는 말이 있다. 명분은 말 그대로 그의 신분에 맞게 이름에 맞게 꼭 지켜야 마땅하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시대도 변하고, 말한 시점에서 수없이 많은 변항들이 존재한다. 명분이 굳어진 무언가가 되어선 안 된다. 말랑말랑한 상태가 아니고 굳어진 것이 될 때 명분이라는 그 말에만 사로잡히게 된다. 전체 속에서 사건을, 지켜야 할 것을 보지 않고 오직 '지키느냐 마느냐, 그렇게 말했지 않느냐, 당신은 무엇이지 않느냐'에만 중점을 두고 싸우면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싸움거리만 제공하고 중요한 무언가는 묻히게 된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세워 놓은 것들, 제도, 약속, 신분 등은 그 시대에 맞게 재고하고 틀을 세워야 할 것들이 많다. 한번 정한 것이 꼭 영원한 것은 아니다.

정영효 시인의 시 '명분'에서 시적 화자는 '그사이에 무언가 일어났지만 굳어지길 거부하고', '어떤 것은 사라졌고 어떤 것은 더해졌다'고 한다. '그사이에 무언가 일어났으므로'.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며' 등에서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고, 일어났다는 것을 반복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명분이 중요하지만 '항상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려의 대상이 될 때 명분은 죽은 명분이 아니라 생기있는 말랑말랑한 명분이 될 것이다.

명분

그사이에 무언가 일어났다
어제 열린 문과 오늘은 잠긴 문
구석에 둔 가방 속에 잃어버린 물건
약속했으니 다시 시작한 계획
그사이에 무언가 일어났지만 굳어지길 거부하고
기억은 빠르게 모여서 다짐으로부터 멀어진다
언뜻 그대로인 것 같은 이 거리에도
어떤 것이 사라졌고 어떤 것은 더해졌다
그사이에 무언가 일어났으므로
익숙한 모습으로 변하는 중이다
그러나 나는 무너진 기대에 대해서 알고 있다
지나간 속박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모두 알았다고 확신하는 순간
다급한 판단은 다가온다
이름을 부르며 사람을 찾는 것처럼
이름은 잊은 채 얼굴을 떠올리는 것처럼
전부를 모르는데도 필요한 생각들은 쌓여간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며 누군가 안부를 묻는다면
나는 대답을 망설일 수 있지만
언제든 끝을 열어두면 나머지는 시작된다

-정영효 시집 「날씨가 되기 전까지 안개는 자유로웠고」(2023, 문학동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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