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시위 재판 줄줄이 무효… 기세 꺾인 탄압, 독립운동 불씨 살렸다 [일제 법정에 맞선 독립운동가·(6)]

박경호 2025. 7. 9.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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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사법부 발칵 뒤집은 공소 불수리 사건 <下>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독립 만세 시위였던 3·1운동 핵심 지도자들의 ‘형사 소추’가 무효가 된다는 역사적 상상을 해보자.

한반도를 넘어 동포들이 정착한 해외까지 들불처럼 번졌던 독립 만세의 함성을 터지게 한 이들이 처벌받지 않고 풀려났다면, 그 함성은 실제 역사보다 더 오래 메아리쳤을지도 모른다.

‘본 건 공소는 수리하지 않는다’
3·1운동 지도자 48명, 공소 무력화
재판장, 2시간 동안 판결문 읽어
‘송치 의사’가 ‘송치 선언’은 아냐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팀은 지난 5편(6월26일자 11면 보도)에서 민족대표 33인 등 3·1운동 지도자 48명의 1920년 7월 경성지방법원 재판에서 불거진 ‘공소불수리’ 사건을 법정 드라마로 재구성했다. 3·1운동 지도자들의 변호인 허헌(1885~1951)은 이들의 사건이 고등법원에서 지방법원으로 적법하게 ‘송치’(오늘날의 ‘사건 이송’에 해당)되지 않았다는 점을 파고들면서 법원이 공소를 받을 수 없다는, 즉 ‘형사 소추는 무효’라는 주장을 펼쳤다. 1920년 7월17일 경성지방법원 재판부는 허헌의 주장을 별도로 심리해 판결하겠다며 재판을 멈췄다. 식민지 조선이 발칵 뒤집어진 일대 사건이었다.

공소불수리 주장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앞두고 당시 동아일보가 허헌을 인터뷰했다. 서울 종로 전동여관에 머물던 허헌은 청초한 흰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혼연한 웃음을 띠며 기자를 맞았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피고의 이익을 위해 주장한 일”이라며 “형사소송법으로 공소불수리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피고는 전부 석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1

1920년 8월9일 경성지방법원 특별법정에서 재개된 재판은 일제강점기 최고 법정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동아일보 1920년 8월10일 신문에서 보도한 전날 ‘공소불수리’ 판결을 받고 서울 정동 경성지방법원 법정을 나와 차량에 타고 있는 3·1운동 지도자들. 여전히 수갑을 차고 포승에 묶인 채 얼굴을 가리는 용수를 쓰고 있다. 사진 복원후 색을 입혔다. 출처/동아일보

몰려든 민중들 일본 경찰 해산 나서
‘조선 사법부 최고 권위 손상’ 보도
수원·안성 시위 참여자들도 무효
일제, 항소심서 뒤집고 잇단 유죄
불수리 판사 ‘좌천’ 패배 검사 ‘승진’

■ 일제 사법부 굴복하다

“주문. 본 건 공소는 이를 수리하지 않는다.”

예정된 재판 시작시간보다 1시간40분이나 늦게 법정에 입장한 타치카와(立川) 재판장은 이같이 판결문 속 한 줄짜리 주문을 또박또박 일본어로 읽었다. 재판부가 3·1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공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판결이다. 즉 사건은 고등법원에도 경성지방법원에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공소는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주문을 읽기 전 타치카와 재판장은 사카이(境) 검사에게 공소불수리 문제에 대한 변론을 허용한다고 했으나, 검사는 힘없는 목소리로 “앞선 변론 외에 다시 할 말이 없다”고만 말했다. 허헌 역시 “이전 변론 외에 더 할 말은 없다”고 했다.

판결 주문을 선언한 재판장은 그 이유를 담은 판결문을 2시간 동안 읽었다. 매우 세밀하고 방대한 법리인 탓에 조선어에 능하다는 일본인 통역원도 통역에 애를 먹었다. 방청권을 얻으려 전날부터 밤을 새며 기다렸던 일부 방청객은 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

당시 방대한 판결 이유를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2012년 낸 책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경인문화사)에서 정리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재판부는 사건이 적법하게 경성지방법원에 계류돼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사건은 고등법원 특별형사부에 계류해 있으며, 지방법원은 사건의 재판을 진행할 형식적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고등법원이 해당 사건을 지방법원으로 송치할 의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더라도 그 ‘이유’에서는 ‘주문’을 도출할 수는 없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주문’은 재판소의 결정된 의사 표시, 즉 ‘선언’이라며 ‘주문’만이 법적 효과를 갖는다고 했다. ‘이유’는 그 ‘선언’으로 생길 사실상·법률상의 근거를 설명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등법원이 경성지방법원에 사건을 송치하는 취지의 선언을 하려고 한 의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더라도 ‘의사의 존재’는 ‘의사의 표시’(선언) 그 자체가 아니라는 법리적 판단이었다. 3

이번 재판은 변호인의 승리로 끝났다. 방청객과 밖에서 기다리던 민중은 독립운동가 피고들의 얼굴을 보려 법원 입구까지 늘어섰다. 일본 경찰들이 군중을 해산했다. 4

기록에는 없지만, 법원을 나서는 독립운동가들을 향해 누군가는 환호를 보냈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재판 직후 동아일보는 ‘횡설수설’이라는 가십난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조선 사법부의 최고 권위라는 고등법원의 면목은 이날 경성지방법원 타치카와 판사의 ‘독립선언 사건 공소불수리 판결’로 여지없이 손상됐다.” 5

이날 재판에서 사법 당국을 굴복시킨 주역 허헌은 법정에서 나와 “만약 복심법원(2심)과 고등법원(3심)에서도 공소불수리가 확정된다면, 우리 피고인들은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법률상 사법 처분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6


■ 식민지 사법 시스템 흔들다

조선총독부는 애초 3·1운동 지도자 48명을 내란죄로 기소하려 했다가 고등법원 예심 단계에서 무산(5월1일자 11면 보도)됐다. 이는 공소불수리 사건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당시 사법 당국은 3·1운동 지도자 48명에 대한 내란죄 구성을 위해 경기도 안성, 수원 장안면·우정면 등 전국에서 격렬했던 만세시위 6건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48명 사건’에 묶어 재판에 넘겼다.

수원, 안성 사건은 3·1운동 당시 가장 격렬하고 참여 인원이 많은 시위로 꼽힌다. 수원 사건의 피고인 27명과 안성 사건의 피고인 127명도 모두 각자 재판에서 공소불수리 판결을 받는다. 3·1운동 관련 주요 사건들의 형사 소추가 줄줄이 무효가 된 것이다.

이들 사건 재판장 또한 타치카와 판사였다. 여러 사건의 재판에서 계속해서 공소불수리 판결을 해야 했던 경성지방법원 타치카와 재판장은 수원 사건 공판에서 “본 건은 고등법원에서 수리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심리하겠다”며 ‘지방법원’을 ‘고등법원’으로 바꿔 말하는 우스운 해프닝도 있었다. 타치카와는 공소불수리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한 다른 사건의 변호인에게 “왜 딴소리를 하느냐”며 고함을 치기도 했다. 7 패소한 사카이 검사가 복도에서 재판장의 멱살을 잡고 격투하는 촌극까지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8

사법 당국은 극비리에 회의를 열어 공소불수리 사태 수습 방안, 식민지 조선의 재판 제도 개정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9

동아일보 1920년 9월 24일 신문에서 보도한 3·1운동 지도자들의 독립 선언(공소불수리) 사건 항소심 재판 기사에서 사건을 맡은 판사, 검사들의 모습을 그린 삽화. 기사 내용을 고려하면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한 모습으로 보인다. 출처/동아일보

중범죄 처벌 원한 일제, 동력 잃어
3·1운동 지도자들 이례적 낮은 형량
출소뒤 사회 곳곳 중요 역할 맡아

■ 억지 항소로 뒤집히다

우리는 역사로 결말을 이미 안다. 변호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승리했던 법정 투쟁의 결과가 종국에는 뒤집혔다는 사실을…. 당대 파란을 일으켰던 공소불수리 사건이 오늘날 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줄 이은 판결에 대해 검사는 당연히 항소했다. 경성복심법원은 항소심에서 앞선 1심의 공소불수리 판결을 곧바로 취소했다. 그 이유에 대해 경성복심법원은 고등법원에서 해당 사건을 지방법원의 권한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관할 재판소를 지정한 경우, 그 사건을 송치한다는 취지로 주문을 쓰지 않더라도 당연히 지정받은 재판소에서 사건을 진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항소심 판단은 다소 억지스러운 동어반복이라는 게 전문가 분석이다.10

1920년 10월30일 경성복심법원이 판결한 3·1운동 지도자들의 독립 선언(공소불수리) 사건 항소심 판결문 ‘주문’ 부분. ‘주문. 원판결은 이를 취소한다. (중략) 공소불수리의 신청은 모두 이를 각하한다’고 적혀 있다. 출처/국가기록원


3·1운동 지도자들은 1심 판결 이후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10월30일 항소심에서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소요 등으로 대부분 유죄를 선고받는다. 손병희(1861~1922), 최린(1878~1958), 오세창(1864~1953) 등 주요 인사 8명은 가장 형량이 높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피고인들은 그 이하의 형량 또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수원 사건과 안성 사건 피고인들도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일부는 중형을 면치 못했다.

1심에서 공소불수리 판결을 내렸던 타치카와 판사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법률이라는 것은 절대로 신성한 것이니까요. 물론 그 문제(공소불수리 판결)에 대해서는 당국이 정책상으로 봐선 일부러 무리한 해석이라도 해야겠지만, 나는 신성한 법률에 정치적 의미를 포함해 해석하기는 싫습니다.” 11


타치카와 판사는 사법 당국이 정치적 의미를 담아 공소불수리 판결을 뒤집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결국 그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타치카와 판사는 공소불수리 사건 직후 대구복심법원으로 인사 발령이 났다. 사실상 좌천된 것이다. 사카이 검사는 경성지방법원 차석 검사에서 검사정으로 승진했다.

이 사건 이후 허헌은 항일·민족 변호사로서 입지를 다진다. 비록 최종적으로 공소불수리 주장은 패소했으나, 1심의 파장으로 일제 사법부가 3·1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에서 중한 처벌을 할 수 있는 동력은 한풀 꺾였다는 평가가 있다. 3·1운동 지도자들은 이례적으로 예상보다 낮은 형량을 받았다. 대다수가 이미 상당한 형을 치렀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잔여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다. 이후 사회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20 그렇게 독립운동의 불씨는 살아남았다.

[출처] 1) ‘동아일보’, 1920년 7월19일자 기사 2) ‘동아일보’, 1920년 8월10일자 기사 3) 한인섭,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 경인문화사, 2012, 90~94쪽 4) 위 같은 기사 5) ‘동아일보’, 1920년 8월10일자 ‘횡설수설’ 6) ‘조선일보’, 1920년 8월10일자 기사 7) ‘동아일보’, 1920년 7월25일자 기사 8) 변은진, ‘허헌 평전’, 역사공간, 2022, 126쪽 9) ‘동아일보’, 1920년 8월13일자 기사 10) 한인섭, 같은 책, 98쪽 11) ‘동아일보’, 1920년 9월8일자 기사 12) 한인섭, 같은 책 101쪽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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