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유산] (12) 1천500년 청못의 비밀 품은 ‘영천 청제비’

노자의 '도덕경' 8장에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물이 지닌 속성은 항상 낮은 곳을 지향하는 겸손함과 고정된 형태 없이 담기는 그릇에 맞추는 유연함, 모든 생명을 자라게 하면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이타심 등 배울 점이 많다.
예로부터 물을 잘 활용한 나라는 크게 융성했다. 중국 하나라의 우임금은 치수에 성공한 군주였다. 삼국 시대 신라에도 치수에 열정을 쏟은 법흥왕(재위 514~540)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이 531년(법흥왕 18) 왕명으로 제방과 수리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여 536년(법흥왕 23) 영천의 저수지인 청제(菁堤)를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영천(永川)은 삼한 시대 부족 국가 골벌소국(骨伐小國)으로 불렸으나 조선시대 작은 군현은 주(州)라는 명칭을 금지하고, 대신 천(川)과 산(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도록 하면서 영천이라 불리게 됐다. 법흥왕은 강수량이 부족한 영천의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여 수리시설을 보강하기 위해 왕명으로 청제(菁堤)를 축조했다. 청제를 축조한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청제 부근에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 비가 '영천청제비(永川菁堤碑)'이다.
현재 청제비는 영천시 도남동 청제 아래 건립된 비각 안에 두 기가 보존되어 있다. 비각 정면에서 비를 볼 때 오른쪽 비는 앞면과 뒷면에 문자를 새겼는데 앞면은 축조에 관한 기록이 있어 '청제축조비'라고 하고 뒷면은 수리에 관한 내용이 있어 '청제수리비'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 비가 '청제비'이다. 왼쪽 비는 조선 숙종 때 땅에 묻혀 있던 축조비와 수리비를 다시 세운 내용을 기록한 '청제중립비'이다.
청제비는 1968년 신라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된 이후 1969년 보물로 지정됐다가 1개월 전인 2025년 6월 20일 보물 지정 56년 만에 국보로 승격되면서 최근에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청제가 만들어진 이유
예나 지금이나 농업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이다. 이런 자연재해를 대비하여 농업용수를 저수하는 수리시설의 대표적인 형태가 흙으로 만든 둑이나 제방인 제(堤)이다. 제는 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모아 저수하거나 평지를 파서 물을 저수하는 수리시설이다. 제는 고대부터 국가적 사업으로 조성하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김제 벽골제, 영천 청제 등이다.
신라 시대 자연재해에 대처하고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 수리시설의 확충과 정비였다. 청제가 처음 만들어진 법흥왕 때 조성될 당시의 제방 규모는 '축조비'의 기록에 의하면 둑 아랫부분 길이 122m(61심), 윗부분 길이 184m(92심)라 했다. 여기서 1심은 8척으로 양팔을 벌린 길이이다.
청제는 조성한 지 1천 5백 년이 됐다. 현재 청제는 둑길이 243.4cm, 높이 12.3cm~12.4cm로 조성 초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여전히 금호강 동편 평야에 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지의 역할을 맡고 있다.
고대국가는 저수지 축조를 통해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농지 개간을 촉진하여 국가 재정을 증대시켰다. 백성들은 저수지로 인하여 안정적으로 벼를 재배할 수 있고, 제방 축조에 동원됨으로써 진휼미를 지급받아 국가와 백성 모두에게 이득이 됐다.
예컨대 '축조비(536년)'에는 제방을 축조하는데 동원된 인원이 7천 명, '수리비(798년)'에는 청제 수리에 1만 4,140명이 동원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새겨져 있다.

◆청제의 건립역사를 품은 청제비
청제 아래 고즈넉이 자리한 청제비 비각 안에는 두 기의 비가 있다. 비각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 비는 자연석 빗돌에 덮개돌과 받침돌 없이 앞뒤 양면에 문자가 새겨져 있다. 앞면은 청제를 완성하고 세운 '청제축조비'로 병진명(丙辰銘)이라고도 부르며, 536년(법흥왕 23) 2월 8일 처음 큰 제방(塢)을 준공한 사실이 음각되어 있다. 뒷면은 통일신라기에 청제를 수리한 사실을 기록한 '청제수리비'로 정원명(貞元銘)이라고도 부르는데 798년(원성왕 14) 4월 13일 청제를 수리한 내용이 읽힌다.
1968년 12월 19일 신라삼산학술조사단이 옛날부터 청못 아래 비석이 있다는 주민의 제보를 받고 청제 아래 현 위치에서 나뒹구는 비석을 발견했다. 방치된 비석을 발견할 당시 표면이 평평한 축조비(병진명)를 앞쪽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한다.
축조비는 10행, 총 107자 정도 판독된다. 명문 내용은 병진년 2월 8일 오(塢, 제방)를 쌓은 사실, 오의 규모, 오의 축조에 7천 명의 역부가 동원된 사실, 공사의 책임자 등이 기술되어 있다. 이런 내용을 종합하면, 국가적 차원에서 청제를 축조했고, 당시 신라가 수리 관계시설에 국가적 관심이 높았으며, 수리시설에 동원된 사람의 동원 방법 등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서예사적으로는 하부로 내려올수록 좁아지는 장법으로 '포항중성리비'와 유사하고, 행간과 자간이 무질서하며 결구 변화가 많다. 원필의 해서체는 6세기 신라비 전형의 소박하고 토속적인 미의식을 담고 있다.
수리비는 축조비보다 260여 년 뒤 통일신라기에 세워졌다. 이 비의 글씨 풍도 축조비와 유사하여 이 시기까지 6세기 신라 서풍이 이어졌음이 확인된다. 서라벌을 벗어난 지방에는 통일신라기에도 고신라의 미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례이다.
비각의 왼쪽에 있는 비는 1688년(조선 숙종 14) 청제축조·수리비를 다시 일으켜 세운 사실을 기록한 '청제중립비'이다. 여느 조선시대 빗돌처럼 빗면이 말끔히 다듬어져 있고, 덮개돌과 받침돌 없이 윗면 양쪽 모서리를 조금씩 잘라 멋을 냈다. 이 비를 통해 조선 숙종 시기의 질서정연한 문자미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영천청제비를 찾으면 1천 2백 년 세월을 초월한 두 기의 비석에서 각각 다른 서예 문화를 비교할 수 있다. 덤으로 신라 시대 조성된 청제까지 살펴보는 역사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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