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 혹독한 고문의 독소, 몸·정신 갉아먹다

곡괭이 자루로 패고 군홧발로 짓밟고 상상할수 없는 가혹행위
짜맞춘 수사에 원하는 답없으면 영락없이 곤봉 휘두르고 매타작
힘없는 이 지목해 타격대원 고발케하고 상호 인간관계 짓밟아
감시와 미행으로 정상적인 생활 어려워 이혼에 경제난 신음
기동타격대는 창설한 지 15시간 만에 활동을 멈췄다. 대원들은 대한민국 최정예 부대 병력인 계엄군의 무자비한 공격 앞에서 버텨내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오로지 광주를 지켜야 한다는 의로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체포된 이들에게 가해진 고문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계엄군의 인간 사냥의 독소는 타격대원들의 몸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갔다. 강산이 4번이나 바뀐 45년의 세월에서도 몸과 마음에 뿌리내린 아픔은 대원들의 육체와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
기동타격대는 5월27일 새벽 5시께 3공수여단 11대대 제1지역대에 의해 완전 진압됐다. 계엄군이 이날 새벽 3시께 전날 항쟁지도부가 죽음을 불사한 시민군 200여명을 전투조로 분산 배치한 YMCA,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을 점령하고, 새벽 4시가 지나면서 외곽에서 도청을 완전포위하고 무차별 사격을 했다. 도청 내부로 진입한 특공조도 각방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기동타격대 43명은 사망자 3명과 행불자 3명을 빼고 체포됐다.
윤석루 대장과 이재춘 1조 조장은 계엄군이 도청 뒤쪽에서 공격해오자 2층민원실에서 내려와 정문 쪽에 있는 트럭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이 씨가 지닌 총이 바닥에 떨어져 들키고 만다. 계엄군의 위협사격에 트럭밑에 숨은 이들은 나와 체포됐다. 도청 앞 도로 위에 핏자국이 흥건하고 본관 입구쪽에 죽은 사람이 많았다.
김공휴 5·18부상자회 국장은 무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끌려 나갈 때 도청 입구에서 죽은 사람들을 많이 목격했다. 그 숫자는 당국이 발표한 규모보다 더 많지 않았냐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고 밝혔다. 27일 당일 도청에서 16명 등 그 일대에서 총 25명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윤석루 대장은 김종배, 박남선, 윤강옥 등 도청 상황실 핵심 인물 12명과 함께 505 보안대서 별도로 조사를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가슴, 얼굴 등을 수없이 구타당하고 3박4일 동안 잠을 못 자는 고문을 받았다. 그는 집시법 위반으로 조서를 꾸몄으나 나중에 내란죄로 다시 조사를 받고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1심에서 내란주요임무종사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10년 특별감형됐다.
공군 방위병이었던 이재춘씨는 현역 군인임이 드러나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계엄군은 5파운드 곡괭이 자루로 두들겨 패고 무릎사이에 곡괭이를 끼워 넣은 채 군홧발로 밟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었다. "총을 몇발 쐈느냐"등을 물어, 그들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면 가혹행위는 쉼 없이 반복됐다. 이씨는 근무이탈과 내란 실행으로 징역 5년이 선고됐다.
시위에 참여한 이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수류탄을 몸에 두르고 다녔다는 1조 구성회씨 구술도 눈물겹다.
26일 오후 6시 '최후의 만찬'후 순찰을 마치고 도청에 복귀한 구씨는 도청 기둥에 의지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새벽 4시 정도 머리에 흰띠를 두른 계엄군이 총을 난사하며 도청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들을 향해 정확히 대응사격을 하던 구씨를 본 계엄군은 "저새끼, 총쏜다. 조준사격. 조준사격"을 외쳤다. 총을 내려놓은 구씨는 손과 발을 뒤로해 포승줄로 묶였고, 그가 입은 청색 카바옷등에 '극렬분자'라 적었다. 그는 도청 본관과 별관을 연결하는 통로로 질질 끌려 갔다. 이를 본 다른 군인들이 "죽여 버리지 뭐하려 살려가지고 왔냐"고 말하면서 구씨옆에다 총을 한 방 쏘았다. 구씨는 튄 파편에 맞아 죽는 줄 알았다.
26일 농성동 한전앞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계엄군의 탱크와 맞선 임성택씨는 27일 새벽 2층 회의실 벽에서 기대어 쉬고 있다 깜박 잠이 들었다. 꿈결에 "타당타당"하는 소리가 들려 깨보니 실제상황이었다. 임씨는 창문을 깨고 총알이 30발이 들어있는 탄창 하나를 모두 소진했다.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면서 곤봉으로 40대 이상을 맞았다고 구술했다.
수사관들은 악질적이었다. 원하는 답을 하면 빵을 하나 주기도 했다. 식사량이 적어 배고픔에 시달린 대원들의 심리를 교활하게 이용한 것이다. 26일 공포탄을 하늘을 향해 쐈다고 진술하면 빵을 하나 주는 식이었다. "공포탄은 하늘을 향해 쏘면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하면 수사관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총알에 맞으면 죽지, 안죽냐"며 때리고 고문했다. 수사관은 무릎 사이에 곤봉을 넣고 군화로 밟는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하든 맞고, 고문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수사관 마음대로식 조사였다.
계엄군은 불만이 있으면 타격대원들을 향해 곤봉을 휘둘렀다. 항변하면 할수록 더욱 심하게 내리쳤다. 맞을 때마다 몸에서 온 힘이 빠져나갈 정도로 무서운 폭력 도구였다. 물푸레나무와 박달나무 등으로 만들어진 계엄군 곤봉은 경찰 곤봉보다 10여㎝ 더 길었다. 쇠처럼 단단해서 심각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기동타격대에게 가해진 구타는 다반사였고, 원산폭격, 한강철도, 통닭구이 등 고문 역시 반복됐다. 잠을 못 자게 하면서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을 붓는 만행은 참기 힘들었다.
광주교도소 특사도 인간 도살장을 방불케 했다. 교도소에서 순화교육 명목으로 군인들에 의해 구타와 비행기 태우기 등 고문이 날마다 쉬지 않고 일어났다. 비행기 태운다는 것은 포승줄에 몸을 묶어 동서남북으로 줄을 잡아 당겨 자기 앞으로 오면 발로 차는 가혹 행위였다. 상무대 영창과 교도소에서 은밀하지만 대놓고 이뤄진 고문은 국가 권력 앞에 개인의 나약함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계엄군의 악랄함은 비열함 그 자체였다. 약간 어리숙한 이들을 지목해 집단 폭행을 가한 후 극렬분자를 지목게 하는 협박은 타격대원들의 신뢰관계를 짓밟았다.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인 상태에서 가르침을 당한 이는 멘붕에 빠진 채 매타작을 당했다. 이들에게 질문 내용은 비슷했다. "계엄군을 향해 사격 했는지", "김대중을 만났느냐", "광주경찰서장 내정 받았느냐" 등 내란죄에 짜맞출 목적으로 얼토당토 않은 물음으로 타격대원들을 극도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때도 원하는 답을 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구타와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윤석루와 양기남, 김공휴씨에는 많은 죄목이 씌였다. 주유소 가서 휘발유 넣은 것도 갈취 , 성아맨션 주민들이 김밥을 넣어준 것도 갈취, 방림동 예비군 동대에서 제공한 식사와 주민 등의 자발적 도움도 갈취로 엮었다.
이처럼 악독한 고문을 받은 타격 대원들은 의식을 잃고 통합병원에 수차례 후송됐다. 2조 조장 박승열씨는 구타를 너무 많이 당해 영창에 있는 3~4개월 동안 체중이 40㎏ 빠지고 통합병원에 3번 실려갔다. 특히 통합병원에 입원 중에도 밤에 지하실로 끌려가 철제 의자에 앉힌채 붕대를 입에 넣고 곤봉으로 다리 등을 맞았다. 쓰러지면 군홧발로 밟았다. 박씨는 정신과 질환으로 입원한 적도 있고, 내과·외과 등 여러 질병에 겹쳐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지금도 어지럼증, 두통 등 고문을 당하는 꿈을 꾸며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상무대 영창에서는 굶주림도 타격대원을 비롯한 시민군들의 존엄성을 위협했다. 식기 하나에 2인분을 양쪽에 나누어주었는데, 양이 너무 적어 한두스푼 먹으면 없어졌다. 소금물을 부어 양을 늘려 먹기도 했지만, 한 스푼이라도 더 먹으려고 동지들끼리 싸우기도 했다.

"가장 성공한 순간은 가정을 꾸렸던 일이고, 가장 실패한 것은 가정이 무너진 것"이라는 어느 타격대원의 독백은 마음을 아린다.
6조 나일성씨는 구술집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아무 기억이 없다"고 했다. 얼마나 심한 고문을 받았으면 기억이 없다고 했을까.
"고문의 기억이 없다"는 나씨는 현재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수면제를 복용해도 잠을 자기 힘들다. 고립무원의 그는 알코올에 의존하다 보니 몸도 망가졌다. 이처럼 기동타격대는 고문 기억의 공포속에서 혹독한 후유증으로 세상과 고립돼 갔다. 통증을 이겨내기 위해 가까이한 술은 자신의 삶을 비판하는 자학을 불러왔고 자학은 다시 그의 성격마저 포악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결국 술에 지배된 몸은 무너져갔고 .가족들 역시 갑자기 찾아온 불행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5·18이후 파악된 35명의 타격대원중 6명이 세상을 떠났는데, 2명은 스스로 목숨줄을 놨다. 생활고와 고문 후유증 때문이었다. 4명도 고문 후유증으로 투병하다 유명을 달리했다. 지난 10일 변사체로 발견된 고 김재귀씨도 병마와 생계난으로 이혼을 한 채 혼자 생활하다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고인은 죽는 순간까지도 고문의 상흔을 놓지 못했다. 5월27일 전남도청을 지킨 타격대 구술집에 참여한 28명 생존자 중 기초수급자는 8명에 달했다. 대부분 기층민중으로서 이들의 삶이 지난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방증이다.
기동타격대 동지였던 고 김재귀씨를 안장한 지난 14일 무등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양기남 기동타격대동지회장은 "회원들은 오래전부터 정신과·내과 약을 달고 살고 있다. 몸은 망가진데다 경제적으로 힘들어, 회원들의 정상적인 가정생활은 50대 50으로 보면 된다" 한숨을 쉬었다. 민주유공자인 타격대원들은 병원비는 보호 1종으로 의료보험혜택을 받나, 간병비는 지원이 안돼 부담이 적지 않다. 김공휴 5·18부상자회 국장은 "하루에 약 40알을 먹어야 한다. 이달부터 위에 부담을 주는 약을 빼고 먹는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할땐 간병비 등의 부담도 너무 크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박승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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