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0장] 황룡촌 전투(182회)

경군 대관 이학승이 그 자리에 풀석 고꾸라지더니 입에서 짓붉은 피를 토했다. 지켜보던 부관 정필진이 달려들어 그를 부축했다.
"장군, 왜 이러십니까."
"총을 맞았다. 가슴이다."
정필진의 품에 안긴 이학승은 한동안 고통스런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우리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이학승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필진은 처음에는 못알아 들었지만 그가 다시 "왜 우리가 여기에 있지?" 하자 알아들었다.
"장군, 이러시면 안됩니다. 어서 일어나서 개기는 저 반도(叛徒) 놈들을 싹 쓸어버려야 합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필진아,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네?"
"저들이 들고 일어난 진정한 뜻을 모르겠느냐?"
"장군, 왜 이러십니까. 저놈들은 우리 중앙군을 꼰지르고 개아리 트는 시러베 놈들입니다. 씹어먹어도 분이 안풀리는 반도 놈들의 뜻을 알아서 무얼합니까. 사백년 조선 왕조를 아작내려는 저런 반역배들 생각을 하다니요. 창자를 모조리 뽑아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 아닙니까요. 어서 일어나셔서 저놈들 씨를 말려버려야 합니다."
생각만 하여도 이가 갈리는 놈들인 것이다.
경군의 화력은 아직도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이학승과 원세록, 오건영의 지휘 아래 친군 심영(親軍 沁營) 병력은 왜나라와 서방에서 들여온 모슬총(마우저 소총), 극로백(크루프 포), 회선포(개틀링 기관총), 회룡총(레밍턴 롤링블럭 소총)으로 무장하지 않았는가. 전라감영군도 참여하고, 지난밤엔 징발한 농민병사도 들어오지 않았는가. 그중 경군의 전투력은 황토현 전투에 나섰던 전라감영군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우수 병력인 것이다. 전열을 재정비해 얼마든지 초장에 발라버릴 수 있다. 그런데 이학승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다시 읊조렸다.
"우리가 어쩌면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안보이는가? 백성들이 일어난 것은 필시 무엇인가가 있다. 안보이느냐?"
"장군, 헛것을 볼 때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저 새끼들은 상감마마의 웬수들일 뿐입니다."
"아니다. 그 무엇인가는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보지 못했다. 오만하였다. 벌레로만 취급하였다. 나는 어차피 죽을 몸, 되돌아보니 왕조는 너무하였다. 백성을 위한 왕조가 아니라 온갖 특권을 누리기 위한 잡배들의 온상이었다. 반칙과 불법과 오만과 군림 뿐이었다. 죽음 앞에 이르니 그런 것이 다 보이는구나."
"장군, 헛것이라니까요."
금방 일어날 것처럼 말하는 이학승을 보고 정필진은 혼란스러웠다. 실제로 그가 일어난다면? 그러면 그는 맹세코 반역의 몸이 된다. 반역이라면? 이 내용을 왕실에 고변하지 않으면 국록을 먹는 사람으로서 직무유기가 된다. 그런데도 고변하면? 상관을 하늘같이 모시던 부하로서 의리를 배반하게 된다. 군사 조직은 혹 이탈자가 나오면 감시하고, 수 틀리면 밀고하라는 직무도 있다. 그래서 침묵하면 반역자가 된다. 이렇게 왕조의 틀은 짜여져 있다. 그렇게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음해와 모함과 이간질로 당했던가. 조직이 파편화·형해화 되어도 주군을 위해서라면 별 짓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이걸 어쩐다?
정필진은 혼란스러워서 껴안고 있던 이학승을 내동댕이쳐버릴까, 하는 마음도 가졌다. 그의 옷에는 벌써 붉은 피가 흥건히 적셔지고 있었다.
"내가 세상을 헛 산 것 같구나."
죽음 앞에 이르면 정말 헛것을 본다더니, 여지껏 왕조의 기둥이 되어 체제 수호의 중심이 되었던 사람이 갑자기 동학농민군 대오와 이념을 함께 하는 말을 하다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필진은 더 이상 생각할 겨를없이 이학승을 냅다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다. 이럴 바에는 예의고 나발이고 차릴 수가 없다. 빨리 사라져야 후환을 막을 수 있다. 그가 죽어야 자신이 살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그가 살아나면? 사안이 대단히 복잡해질 것이다.
그는 거듭 생각하였다. 상황을 왕실에 고변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대관을 배신하는 행위가 된다. 그 결과로 왕조로부터 훈포상을 받고, 승진한다고 해도 상관을 팔아 이익을 취한 배신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 양심이 허락될 일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