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김철, 천석 재산 팔아 임시정부 세운 유일한 전남 출신 "기억하는가" [광주전남독립운동 현장]

1919년 3·1 독립 선언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부정하고 '독립국'임을 선포했다. 독립국을 선언했으니 응당 독립된 나라를 세워야 했다. 이 거대한 민족적 움직임이 임시정부 수립으로 모아졌다.
러시아 땅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에서는 '한성정부'가 각각 세워졌다. 이 임시정부 주역들은 국내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인정하면서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합의했다. 정부 청사는 중국 상하이에 두기로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수립된 국민주권 국가이고 민주공화제 정부였다.
한시준 전 독립기념관장은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할 때 까지 우리 역사는 군주가 주권을 가진 군주주권 국가였고, 전제군주제였다" 면서 "수 천 년 동안 지속돼 온 군주 주권이 국민주권으로,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바뀌게 된 것은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해서였다"고 밝혔다. (한시준 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참고)
실상 1919년 온 한반도를 뒤흔든 3·1만세투쟁의 최대 성과는 바로 왕의 나라에서 민(民)의 나라로 대전환이었다. 그 성과물이 상하이에 우뚝 선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
#구봉마을에 선 기념관, 동상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마을. 마을 길을 따라 오르면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를 재현한 건물에 안중근 장군 동상, 오른쪽으로 일강 김철 선생을 모시는 사당 구봉사와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임정 건물 뒤편에는 일강 묘지와 사연을 지닌 한 그루 소나무 단심송이 서 있다.
일강 김철기념관은 함정리 일원 1만770㎡(3천300여평) 부지에 사당, 수양관, 기념관, 관리사 등을 갖추고 있다. 기념관에는 김철 선생 생전의 사진, 유물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당시의 각종 자료가 전시되고 임시정부 회의 장면 등이 재현돼 있다.이곳을 찾는 이들은 왜 이곳에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재현돼 있는지 묻는다. 임정 청사도 김철 선생과 인연이 있다. 그가 전남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임정 초기에 참여한 핵심인물인지라 그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 중국 상하이 망명 신한청년당 창당
일강(一江)김철(金澈ㆍ1886~1934). 그는 1886년 10월15일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9번지(구봉마을)에서 태어났다. 1908년 9월 22세 때 영광의 광흥학교에 입학하여 중학 과정을 마치고, 1909년 경성의 법부 법관양성소에 입학, 1912년 3월 졸업했다. 처음에는 법관양성소 예과에 들어갔다가 후에 법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이어 일본 명문대학인 메이지 대학에 유학, 1915년 졸업했다. 일제는 메이지 대학 유학파인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온갖 회유와 협박이 그치지 않았다.김철은 1917년 일신의 영달을 차단하고, 조국 독립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상하이 망명길에 올랐다.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여운형, 장덕수, 선우혁 등 젊은 엘리트들과 교유하면서 1818년 8월 독립운동의 모체,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다. 김철은 창당 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신한청년당은 한국 최초의 근대 정당으로 당수는 여운형이 맡았다. 신한청년당은 발 빠르게 국제정세에 조응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국내·외에서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기획했다.
우선 1918년 12월 독립 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1919년 1월에는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김철도 당의 전술 방침에 따라 1919년 2월 국내로 파견됐다. 전남 영광광흥학교 동창 조병모의 집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승려로 변장했다. 전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지방 유지들로부터 독립 자금을 모금했다. 또한 고향 함평에 들러 막대한 가산을 처분했다. 이때 김철이 접촉했던 주요 인물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 을사오적 처단에 나섰던 기산도 등이었다.
신한청년단의 눈부신 활약으로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한국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3·1 만세 시위 투쟁이 터져 나왔다.
김철 등 신한청년당 지도부는 만세 투쟁에 힘입어 임시정부 수립에 착수했다. 상하이 프랑스조계 보창호 329호 건물에 '독립 임시사무소'를 설치했다.
#임시의정원 유일한 전라도 의원
1919년 4월 10일 마침내 임시의정원이 창설되었다. 의정원은 요즘의 국회였다. 이날 전국 각 도의 지역구 의원 29명을 먼저 선발한 뒤 다음날 임시정부 각료를 선출했다. 초대 임시의정원 인사 29명 중 유일한 전남 대표는 김철이었다.
임시의정원은 각 지방 인민의 대표위원으로 조직됐고, 의원의 자격은 중등교육을 받은 23세 이상의 남녀로 한정했다. 의원의 수는 지방 인구에 의거하여 정하되, 30만 명에 의원 1인을 선정했다.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평안도 등 6개 도에서 6인씩, 황해도, 강원도에서 3인씩 뽑았다. 국내 42명과 중국교민, 소련교민, 미국교민을 대표하여 3인씩 뽑은 국외 9명 등 모두 51명이 정원이었다.

#군무장, 교통차장 맡아 국내와 연결
1919년 8월 5일 임정은 위원제를 폐지하고 차장제를 시행했다. 김철은 초대 교통차장으로 임명됐다. 교통총장 내정자는 문창범으로, 최재형과 함께 소련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교통국은 국내와의 연락, 정보 수집, 국내동포와 일제의 동향을 파악·보고함으로써 임정의 활동 방침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요즘으로 치면 국가정보원에 해당했다.
김철은 8월 20일 '임시 지방교통 사무국 장정'을 반포하고, 지방교통국의 설치와 조직을 확정했다. 김철과 관련, 교통부의 국내 거점이 마련되었음을 1921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가보훈부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철(2006.10) 자료에 따르면, 경북 안동에 사는 안상길은 "상해로 건너가 교통총장(대리) 김철을 만나보고 조선 내지 연락과 독립운동 방법의 전달과 동 자금 모집을 하기 위하여 조선 내지에 교통부를 설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때 안상길이 김철을 가리켜 교통총장이라 한 것은, 1919년 11월 26일 러시아에 체류 중인 문창범이 교통총장 취임을 거절하였기에 임시헌법에 의하여 교통차장을 맡고 있던 김철에게 교통총장 대리의 직무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김철은 1924년 5월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1926년 12월 김구(국무령) 내각 국무위원에 임명됐다. 1927년 8월에는 이동녕 내각에서 군무장에 임명된다. 군무장은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이다. 1930년 11월 8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철은 또다시 군무장에 선출됐다.
그 무렵 임정 사무실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 이봉창, 일본에서 독립운동하려고 왔단다. 또 한 청년이 문을 열었다. 충청도 사투리가 남아 있었다. 윤봉길…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