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꿈의 조각을 이곳에서 보았지
앞에서 바라볼 땐 뒷모습이 궁금했지
섬의 피붙이 같은 한림에서 십오 분 거리
맨 먼저 겨울로 드는 비양도를 찾던 날
하늬바람 절기 때면 성한 곳이 없는 바다
중산간 억새밭이 이곳까지 내려와서
그 곱던 수평 눈금이 뒤집히고 있었지
눈은 뜨고 있어야지, 가라앉지 말아야지
난파선 갑판 위에 천길 해역을 떠돌다가
하얗게 의식을 잃고 늑골들이 누운 곳
최소한의 생존율로 제 할 몫을 챙기는 것들
한 치 높이 목 줄기에 제 키만 한 이삭을 피워
바위틈 강아지풀이 제 영토를 지키며
섬 비탈 씨앗들은 십중팔구는 바다로 가서
낮에는 억새꽃이, 밤이 들면 민들레 꽃
바람길 물마루 가득 사시사철 피웠지
벼랑 끝 바위틈에 바다 근성을 피우는 것들
바람이 이 섬에다 강한 씨앗을 물고 와서
낮추어 버티는 법을 저들끼리 나눈다
단풍 끝물쯤에 없는 듯이 자리를 지킨
북벽에 횡으로 자란 예덕나무 몇 그루가
오늘은 안간힘 다해 제 빛깔을 보이고
바다를 사랑하다 바다를 등지고 사는
겉늙은 해송들…, 아 저건 바람의 형상
절반쯤 남긴 솔잎에 해조음이 이누나.
/2000년 고정국 詩
#시작노트
하늘이든 땅이든 바다든 섬이든 돌멩이든 지푸라기든 꽃이든 물방울이든, 그 어떤 대상과도 소통할 수 있는 자가 시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21세기 첫해, 한림읍 비양도에 며칠 동안 민박하면서 썼던 시조형식의 스토리텔링입니다.
이곳저곳 시간과 공간 속에 가물거리는 사건과 사람과 사물, 심지어 내면의 언어 또는 미래의 낱말들까지 계단 계단에서 나를 향해 눈짓을 보내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엎디어 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었을 때, 한 계단 두 계단 징검다리 구실을 하던 이들 쓰레기들이 어느새 사람의 형상으로, 또는 하늘의 형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