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783만명…진상규명도 유해 발굴도 ‘80년째 미완’

홍석재 기자 2025. 7. 8.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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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rgb(0, 184, 177);">광복 80돌 한일 국교정상화 60년</span>
지난달 22일 일본 오키나와 도카시키섬 항구에서 200여미터 떨어진 곳에 고 배봉기 할머니가 일제강점기 위안부 삶을 강요당했던 위안소 ‘빨간 기와집’ 터가 남아 있다.

여름 눈부신 햇살 아래 에메랄드빛과 쪽빛이 어우러져 넘실거리는 일본 오키나와의 바다는 아름다웠다. 오키나와 본섬에서 40여분 거리 도카시키섬으로 가는 페리 안내문에는 ‘바다의 낙원 도카시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곳은 ‘지옥’이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던 지난달 22일 도카시키항에서 200여미터 떨어진 조용한 시골집들 사이의 ‘빨간 기와집’ 터는 평화로운 공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였던 고 배봉기 할머니에게 끔찍한 기억을 새겼다. 10평 남짓 터에 태평양 전쟁 말기이던 1944년 11월 도카시키에 일본군 위안소가 만들어졌고, 배 할머니는 위안부 삶을 강요당했다. 이날 만난 주민 요시카와 요시카쓰(87)는 “소학교 시절 마을에 위안소가 생겼는데 조선인 여성 7명이 살았고 그중 ‘배봉기’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빨간 기와집은 원래 ‘나카마조’라고 부르던 우리 삼촌 집이었는데 일본군이 가족들을 내쫓고 위안소로 만들었다”며 “한번은 우리 집에서 일본군 장교들이 위안부를 데리고 술자리를 가졌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렸을 적이었지만 내 또래들이 위안부를 ‘조센피구아’라고 불렀던 기억이 있다”고 덧붙였다. ‘조센피’는 일본군 위안부를 뜻하던 속어이고, 오키나와에서 ‘구아’라는 말을 뒤에 붙이면 애칭처럼 들린다고 한다.

배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세상에 처음 밝힌 증언자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여자 소개꾼’의 말에 속아 1944년 11월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정산소’에서 표를 산 군인들이 줄을 섰고, 끔찍한 일이 매일 이어졌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의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미군 수용소를 전전해야 했다. 생전 그는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1975년 전후 조선인들에게 주는 특별영주권을 얻으려던 과정에 일본 언론에 자신의 과거가 공개됐다. 그는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 요구가 높아지던 1991년 10월18일,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오키나와에서 힘겨웠던 삶을 마감했다.

일제강점기 오키나와는 배 할머니 같은 위안부뿐 아니라 조선인 군인·군속(군무원), 노무자 강제동원이 한 지역에서 일어난 드문 공간이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강제동원을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1931~1945)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권력으로 제국 영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적·물적·자금 동원 정책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흔히 강제동원은 노무자 강제동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많이 쓰이지만, 넓게 보면 피해 유형은 크게 군인, 군무원, 노무자, 위안부를 포괄한다.

지난달 21일 찾은 오키나와현 모토부초 겐켄의 항구 인근 옛 주차장 부지에는 조선인 ‘김만두’(창씨개명 이름 가네야마 만토·金山萬斗), ‘명장모’(메이무라 조모·明村長模)의 이름이 적힌 작은 손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이들은 1945년 1월22일 항구에서 군사물자 적재 작업을 하던 중 미군 공습으로 희생된 뒤, 인근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됐다. 2020년 한국 시민단체 ‘평화디딤돌’과 일본 ‘모토부초 겐켄의 유골을 고향에 돌려보내는 모임’이 일본군 군속으로 동원된 김씨와 명씨의 매장 추정지로 보고 200여명 조사단을 동원해 6일간 발굴을 시도했던 곳이다. 결국 유골 발굴에 실패했지만 한·일 시민들이 뜻을 모아 그 자리에 무궁화 등으로 꾸민 ‘겐켄의 화단’을 만들어 김씨와 명씨 등 14명의 희생자 이름을 남겼다. 이곳에서 만난 나카야마 요시토 ‘오키나와 모토부초 전적 보존회’ 사무국장은 “겐켄의 화단은 추모의 공간이자, 침략전쟁을 반성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21일 찾은 오키나와현 모토부초 겐켄 항구 인근 옛 주차장 터에 일제강점기 일본군 군속으로 일하다 숨진 조선인 ‘김만두’(창씨개명 이름 가네야마 만토·金山萬斗), ‘명장모’(메이무라 조모·明村長模)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다. 한·일 시민들이 이곳을 매장 추정지로 보고 유골 발굴을 시도했지만 흔적을 찾지 못한 뒤, 무궁화 등을 심어 추모공간 ‘겐켄의 화단’을 만들었다.

다시 이곳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요미탄촌 세나하의 작은 오솔길에는 ‘한의 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일제강점기) 조선반도에서 1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강제 연행해 일본군 성노예 혹은 일꾼으로 노역시켰다”며 조선인들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다. 오키나와 민중조각가 긴조 미노루가 비석 옆에 세운 부조상에는 소총 개머리판을 휘두르는 일본군과 끌려가는 조선인 청년, 그의 다리를 붙잡고 울부짖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올해로 해방 80년을 맞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인 피해 사례는 지금도 일본 전역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 따르면, 한반도 안팎에서 군인·군무원·노무자 형태로 강제동원된 이들이 연인원 780만여명에 이른다. 한반도에서만 655만여명, 해외로 끌려간 이들도 125만여명에 이른다. 특히 한반도 밖으로 강제동원된 노무자가 104만명, 일본군에 배속됐던 군인·군속들도 20만명을 넘는다. 이 숫자는 연인원으로 중복 동원도 포함된 개념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숫자는 아니지만, 피해 규모가 광범위했음을 보여준다.

1991년부터 35년간 조선인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천착해온 일본인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가 지난해 개정판을 낸 ‘전시조선인강제동원 조사자료집’을 보면, 확인 가능한 강제동원 현장이 2700여곳이나 된다.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도 일본 전국에 170곳 이상 세워졌다. 전쟁이 한창일 때는 중국, 만주, 필리핀, 남태평양 ‘남양군도’(중서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일대 섬)까지 강제동원이 이뤄졌다. 해방 80년이 지났지만 이들의 피해는 회복되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받은 무상 3억달러 가운데 91억여원을 피동원 사망자 8552명(1인 30만원)과 채권 등 증서에 대한 보상금(7만4963건·1엔당 30원)으로 지급하는 데 그쳤다.

노무현 정부 때였던 2007년 제정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을 통해 사망·행방불명자와 부상자, 급료·수당 등 미수금 피해자에게 일부 보상으로 보완이 이뤄졌다. 하지만 가해자인 일본 정부나 기업의 배상이 아니었던데다, 금액 자체도 적었다.

한·일 시민들의 수십년 투쟁 끝에 한국 대법원은 2018년 노무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해 일본 기업이 배상하라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한겨레에 “대법원 판결은 돈 문제만이 아니라 침략 전쟁과 반인도적 불법 행위에 책임을 묻는 무거운 의미가 담겼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기념비적 판결에 대해 일본은 한-일 청구권협정 위반이라며 반발하고 수출 규제 등 보복 조처를 했고, 윤석열 정부 때인 2023년 3월 가해 일본 기업 대신 한국 재단이 보상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안을 강행해 판결을 무력화시켰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에 따르면, 지난 1월 현재 일제강점기 국외로 강제동원됐던 군인·군속·일반노무자 가운데 확인 가능한 생존자는 640명에 불과하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생존자도 6명뿐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강제동원 희생자 등 추가 피해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나 희생자 관련 상당수 자료를 여전히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한·일 시민단체들이 간헐적으로 공개되는 자료를 수작업으로 확인하고 있지만, 동원자 명부 등에 대한 체계적 진상규명 작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한겨레에 “2018년 대법원 판결로 마침내 ‘1965년 체제’의 장벽을 넘었지만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과거사 진상규명과 희생자 유해 봉환 등 과제가 산적해 있다”며 “이재명 정부가 과거사 관련 위원회 설립 등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나하·도카시키(오키나와)/글·사진 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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