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도쿄 대공습에 당한 ‘조선인 1만명’ 이름도 묻혔다
</span>한국·일본정부 모두 외면한 희생자들<span style="color: rgb(0, 184,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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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공습경보가 울리면서 귀를 찢는 것 같은 소리가 났어요. 막무가내로 도망치다 발밑이 이상해서 봤더니 주검을 밟고 있었어요.”
지난 1일 일본 오사카 절 소젠사에서 오가 요시코는 80년 전 참혹했던 이야기를 대신 말하는 내내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6월, 미군의 일본 오사카 대공습 피해자인 정말선(91) 할머니의 삶을 10여분짜리 ‘1인칭 시점’ 이야기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아픈 역사를 전하고 있다. 아픈 전쟁 체험을 인근 학교 등에서 말하며 평화를 호소해온 정 할머니가 고령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소젠사 전쟁희생자위령제 실행위원으로 인연을 맺어왔던 오가가 그의 이야기를 대신 하기로 한 것이다. 이날 오가의 목소리에는 마치 정 할머니의 혼을 불러들인 것처럼 절절한 아픔이 그대로 묻어났다.
“콰콰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소이탄이 비처럼 쏟아졌고 주변은 불바다로 변했어요. 낮인데도 검은 연기로 하늘이 까맣게 변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검은 비에 몸이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난리통에서 저를 찾았지만, 어머니와 다른 가족 세명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가족들의 주검이라도 데려오려 했지만, 경비대가 개인들이 함부로 옮겨선 안 된다고 했대요.”
“그때 12살이었는데도 이제 어머니 얼굴이 생각나지 않고, 밥을 맛있게 드셨던 기억만 남아 있다”며 “공습으로 집도 타고 모든 것을 잃었으며, 사진도 남은 게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이 전쟁을 두달만 일찍 끝냈으면 우리 가족 누구도 죽지 않았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한다”고 했다. 소젠사는 오사카 대공습 당시 희생된 조선인 73명을 포함한 518명의 위령비가 세워진 곳이다. 정 할머니는 2021년 8월, 이 절의 주지에게 허락을 얻어 가족 4명의 한국 이름을 비석에 새겼다.
미군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였던 1945년 일본의 전쟁 의지를 완전히 꺾기 위해 전략폭격기 B-29를 동원해 일본 본토에 대규모 공습을 벌였다. 3월9일 일본 도쿄, 나흘 뒤 오사카 등에 소이탄 수십만발을 퍼부어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도쿄와 오사카에서만 11만명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가운데 조선인이 1만명 넘게 포함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일 정부의 무관심 속에 지난 80년간 이름마저 묻혀버린 이들이다.
한국 정부가 미군의 일본 대공습 당시 숨진 조선인 희생자에 대해 파악한 것은 2012년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확인한 95명이 전부다. 일본에서는 시민단체 ‘오사카공습 75주년 조선인희생자추도집회실행위원회’가 해마다 오사카 대공습 당시 희생된 이들과 관련한 자료를 추적해 현재까지 조선인 희생자 명단 167명을 파악했다.
명예회복이나 유족에 대한 피해 보상은 먼 얘기다. 일본 정부는 1945년 미군 대공습 당시 일본에 있다가 피해를 당한 민간인에 대해 피해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 2009년 도쿄 대공습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도쿄지방법원이 “전쟁 피해자에 대한 구제는 정치적 배려를 토대로 한 입법을 통해 해결할 문제”라며 기각했다. 전쟁 때 국민 모두가 고통을 참고 견뎠던 만큼 일부만 보상을 할 수 없다는 이른바 ‘전쟁피해 수인(受忍)론’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불법적 식민지배 여파로 일본에 머물렀던 한국·대만·중국 등 외국인에게도 이런 논리를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최근 일본 집권 자민당과 제1 야당인 입헌민주당 국회의원이 포함된 초당파 국회의원연맹이 ‘특정공습 등 피해자에 대한 일시금 지급 등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해 지난달 정기국회 상정을 시도했지만 역시 불발로 끝났다. 해당 법안은 도쿄·오사카 대공습 등 전쟁 피해자들에게 ‘일시금 50만엔(약 470만원)’을 주도록 했다. ‘국적 조항’을 없애 조선인 피해자들도 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구로이와 데쓰히코 전국공습피해자연락협의회 운영위원장(변호사)은 한겨레에 “법안 논의 과정에서 국적 조항이 ‘인권 침해’이자 ‘인류애에 관한 문제’라는 지적이 있었다”며 “휴머니즘 차원에서 국적 조항을 없애는 건 당연하고 ‘배외주의와 자국 우선주의 강화’ 움직임에 맞선다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불법적인 일제 식민 정책 여파로 일본에서 비극적 피해를 당하고도 잊힌 이가 여전히 많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도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두 지역에 머물던 조선인 4만명이 숨지고 7만여명이 피폭된 것으로 파악됐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피폭자가 많았던 이유는 많은 조선인이 군수 공장이 많았던 두 도시에 강제동원 등으로 온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일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서 이 문제를 다루지조차 않았다. 일본 정부가 1957년 ‘원자폭탄 피폭자의 의료 등에 관한 법률’ 그리고 1968년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특별조치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의료비 및 생활보호금을 피폭자에게 지급했지만, 한국인 피폭자에게도 혜택이 오는 데는 피해자들의 지난한 투쟁 끝에 무려 40년 세월이 필요했다.
하지만 원폭 피해자 후손들과 일본과 국교가 없는 북한 내 피폭자들은 아예 지원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북한에도 여전히 원폭 피해자들이 다수 생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로 나이가 가장 어린 피폭 경험자도 80살이 됐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5년 생존 피폭자 규모를 7500여명으로 추산했는데, 대한적십자사 통계로는 지난해 1834명밖에 남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는 한·일뿐 아니라 멀리 사할린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1930∼40년대 일제에 의해 사할린에 강제동원됐던 이들은 혹한 속에 탄광, 벌목장, 군수공장 등에서 일해야 했다. 태평양 전쟁 패전 뒤 일본군은 조선인들을 사할린에 버려둔 채 떠났다. 당시 조선인 4만여명이 난민 신세가 됐다. 소련 당국은 조선인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채 “러시아어를 구사하지 못하며, 일본인과 비슷한 외국 첩자로서 여지가 있는 감시 대상”이자 공산주의로 교화할 대상으로 봤다. 이들은 일제에 의해 동원됐지만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본조차 갈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러시아 국적 혹은 북한 국적을 택했고, 일부는 그마저도 받지 못한 채 가난한 무국적 이방인 노동자로 살아야 했다. 한국 정부는 소련과 수교가 없다는 이유로 이들을 수십년간 무시했고, 1990년 한-소 수교 뒤에도 방치했다. 조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던 이들의 아픔은 대물림됐다. 사할린에서 태어난 유족들은 국적이 한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정한 위로금조차 받을 수 없었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이미 8년 전에 “대일 과거사 피해자로서 사할린 동포의 특수한 상황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다수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지원에서 배제된 이들이 존재한다”고 짚었던 사안이다.
도쿄·오사카/글·사진 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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