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포럼] 받아쓰기-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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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듣고 해당 단어를 글로 옮겨 적는 행위를 받아쓰기, 속된 말로는 '받쓰'라고도 한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생을 상대로 하는 국어 학습 과정의 하나이다.
아이러니하게 받아쓰기의 '받아'가 맞춤법을 잘 모르는 저학년이 가장 어려워하는 단어 중의 하나라고 한다.
사람이 입이 하나고 귀가 둘인 이유를 잘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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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듣고 해당 단어를 글로 옮겨 적는 행위를 받아쓰기, 속된 말로는 ‘받쓰’라고도 한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생을 상대로 하는 국어 학습 과정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한 단어로 된 받아쓰기를 주로 하다가 고학년이 되면 문장 받아쓰기로 연결한다. 받아쓰기를 소홀히 할 경우, 학습 능력에 문제가 되거나 맞춤법 오류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성인이 되어서도 외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드라마, 뉴스, 애니메이션, 영화 등의 매체에서 나오는 대사를 듣고, 그 원어 그대로 받아적는 연습을 하면 단어를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습작기의 예비 작가들이 문장이나 표현을 공부하기 위해 문학 작품을 ‘필사’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언론에서는 사실관계, 즉 팩트를 정확하게 취재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는 행위를 비꼬는 표현으로도 쓰인다. 해외 언론의 기사를 그대로 베껴서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 언론의 받아쓰기 관행이 만연하다 보니 오보나 가짜뉴스의 폐해도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아이러니하게 받아쓰기의 ‘받아’가 맞춤법을 잘 모르는 저학년이 가장 어려워하는 단어 중의 하나라고 한다.
잘 받고 잘 쓰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맞춤법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잘 듣고, 잘 판단하고 산다는 것이 참 어렵다. 남의 말에 끼어들면서 ‘받아쓰기’보다는 ‘되받아치기’에 익숙한 세월이 아니었는지 스스로 반성부터 해본다. 요즘은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쉼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면 측은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사람이 입이 하나고 귀가 둘인 이유를 잘 모르는 것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화물이나 여객을 싣지 않은 기차가 더 시끄럽다.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른다지 않았던가. 그러하니 우선, 내가 길게 말하는 것보다 타인이나 사물, 대상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필자의 졸시 ‘받아쓰기’ 한 편 읽어보자.
달고 맛있는 수박, 꿀수박 사러 오이소~ / 고추, 오이, 당근, 고구마, 대파, 무, 쌈배추, 미역줄기, 토마토, 오렌지, 바나나, 따끈한 손두부 사러 오이소~//
무한반복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한 번도 아줌마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일 년 내내 나의 퇴근 알람이다. 오늘은 많이 팔았을까. 해가 길어져 늦게까지 사무실을 지킨다. 달고 맛있는 문장 한 줄 못 쓴 하루다. 저 트럭 위의 싱싱한 푸성귀보다 영양가 없는 날들이다. 팔리지 않은 것들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햇볕이 다 읽지 못한 책들은 제 무게에 기울어진다. 눈으로만 읽어 이미 기억나지 않는 내용들이 모니터 뒤에 먼지처럼 붙어있다. 빳빳한 납세고지서는 납기를 훌쩍 넘어가고, 다초점렌즈를 껴도 사무실은 희미하다. 나와 함께 늙수그레한 머그잔을 씻는데, 이번엔 조금 젊은 목소리의 젓이다.//
산지에서 직접 담아 싱싱하고 맛깔난 젓 사러 오이소~ / 새우젓, 창난젓, 꼴뚜기젓, 오징어젓, 갈치젓, 까나리액젓, 마른미역, 다시마도 있습니다~
트럭 행상 아줌마 목소리가 숨 막히도록 절절하게 들리는 7월이다. 녹음된 목소리에도 땀방울이 뚝뚝 묻어났다. 땡볕 아래 뿌리를 잃은 푸성귀와 과일들도 점점 기운을 잃어간다. 조금이라도 더 신선할 때, 팔아야 하는 아줌마의 심정이 골목길을 구석구석 누빈다. 또한, 발효된 젓갈이지만 저 뜨거운 트럭 위에서는 속수무책이다. 한시가 급하게 주인을 만나야 한다.
하루 종일 편하게 책상머리에 앉아, 퇴근 시간이 다 되어도, 달고 맛있는 꿀 문장 하나 쓰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기어이 팔리지 못하고 버려질 나의 문장들이 대문을 나선다. 서둘러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아줌마 트럭을 쫓아간다. 이미 트럭은 사거리를 지나 강림교회 쪽으로 우회전해 버린 뒤다.
아줌마의 메아리는 점점 멀어지고, 내 문장에는 닳은 타이어 자국이 희미하게 새겨지는 중이었다.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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