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굴기·美 관세 뚫자”…한·일 新협력시대[글로벌 현장]

60년 전 한국과 일본은 ‘1965년 체제’라는 신작로를 뚫었다. 35년간 일제 식민 지배의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1965년 6월 22일 한·일 협정에 서명하며 새로운 미래로 출발했다. 이후 정치·외교 관계가 부침을 거듭하는 가운데에서도 경제·산업 분야 협력은 비약적으로 확대됐다.
당면한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이다. 중국의 ‘제조 굴기’에 미국의 ‘관세 빗장’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한·일 기업이 손을 잡아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한·일 기업은 과거 수출입 위주의 협력에서 나아가 함께 기술·상품을 개발하고 신시장 개척에 나섰다.
한국 챙기는 이시바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지난 6월 19일 주일 한국대사관 주최로 도쿄에서 열린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했다. 한국 시간으로 전날 캐나다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지 하루 만에 또다시 한국 행사를 찾은 것이다. 한·일 협력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시바 총리는 축사에서 “두 나라 사이에 다양한 국면이 있었지만 항상 폭넓은 교류를 쌓아왔다”며 “올해는 다음 60년을 생각해볼 기회”라고 말했다. 이어 “서로 식견을 공유해 협력할 수 있는 분야, 협력해야 할 분야가 많다”고 덧붙였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1965년 대일 수출 4464만 달러, 수입 1억7498만 달러로 총 2억1962만 달러를 기록했던 한·일 교역은 지난해 약 350배인 772억99만 달러로 늘었다. 한국의 수출국 순위에서 일본은 4위, 일본의 수출국 순위에선 한국이 3위다.
그러나 최근 10여 년만 놓고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대일 수출과 수입은 2011년에 각각 396억8000만 달러, 683억2000만 달러로 정점에 달한 뒤 감소세다. 한국이 주요 중간재 등을 국산화하는 한편 일본 제조기업은 한국 내 생산설비 투자를 늘린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무역전쟁 파도 함께 넘자”
전문가들은 ‘일본 소부장, 한국 중간재, 중국 조립’이란 전통적 분업 구조가 중국의 제조 굴기, 미국의 관세전쟁으로 깨지면서 한·일 기업 간 협력 필요성이 커졌다고 지적한다.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교수는 “한·일 기업들이 중국에선 쫓겨나고 미국은 입장료가 비싸졌다”며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오하이주 파예트카운티에선 LG에너지솔루션과 일본 혼다의 전기차 배터리 합작공장 건설이 한창이다. 연말부터 양산을 시작해 혼다 미국 공장에 공급될 예정이다. 이는 한국 배터리 업체와 일본 완성차 업체 간 첫 합작 사례다.
LG에너지솔루션은 도요타자동차와도 미국에서 배터리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SK온은 올 들어 일본 완성차 ‘빅3’ 중 마지막으로 남은 닛산과 미국용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니시노 준야 게이오대 교수는 “한·일은 미국 관세정책의 주요 타깃”이라며 “미국 내 한·일 기업의 공급망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 견제 여파에 따른 한·일 기업 협력은 조선·해운업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 해운사인 오션네트워크익스프레스(ONE)가 최근 HD현대중공업에 1만59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 8척을 발주한 게 대표적이다.
양국 기업이 주도하는 새로운 협력 모델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한국은 베트남, 일본은 태국에 상대적으로 많이 진출해 아세안에서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양국 공동 공적개발원조(ODA), 한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LG TV·현대차, 日 스며들다
일본 시장은 ‘외국산의 무덤’으로 불린다. ‘메이드 인 재팬’의 품질이 워낙 뛰어난 데다 소비자도 깐깐해 웬만한 외국산 제품은 소비자 눈높이를 맞추기 힘들다. 이런 일본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입지를 넓히고 있다. 가격이 아닌 기술력을 높이 평가받은 덕분이다.
최근 도쿄 시부야에 있는 대형 가전제품 매장 ‘빅카메라’의 TV 코너를 찾았다. LG전자의 올레드 에보(OLED evo) 77형(인치) TV가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빅4 제품을 제치고 코너 입구에 전시돼 있었다. 판매원은 “일본은 전 세계에서 화질에 가장 민감한 시장”이라며 “압도적 화질을 보유한 LG 제품은 프리미엄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LG전자가 일본 TV 시장 문을 두드린 건 2010년이다. 초반엔 브랜드 이미지가 약한 탓에 가격이 100만원만 넘어도 팔기 어려웠다. 그러나 2015년 OLED TV를 내놓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최근엔 가격이 4000만원에 달하는 ‘시그니처 올레드 M(97형)’도 곧잘 팔린다. 일본 OLED TV 시장에서 LG전자 점유율은 10%가량이다.
최근 찾은 현대자동차의 요코하마 고객경험센터(CXC)는 시승, 충전, 구매 상담, 애프터서비스 등을 위해 방문한 고객들로 북적였다. 현대차가 2009년 일본에서 철수했다가 13년 만인 2022년 다시 진출하며 만든 센터다. 센터 측은 “매년 5000명 정도 방문해 3년 만에 1만5000명가량이 센터를 찾았다”고 말했다.
이 덕분에 일본에서 현대차 판매도 조금씩 늘고 있다. 지난해 607대로 전년 대비 24.1% 증가했다. 온라인으로 전기차만 판매하는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수치다. 최근엔 경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캐스퍼 기반 전기차인 ‘인스타’를 내놔 주목받고 있다. 닛산 사쿠라 등 경쟁 차종보다 ‘가성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K반도체와 손잡아야 생존”
지난해 한국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FDI)는 신고액 기준 345억6800만 달러로 역대 최대였다. 그 뒤엔 일본 기업이 있었다. 일본 기업의 지난해 한국 직접투자는 61억21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375.6% 급증했다. 일본 기업의 한국 직접투자는 올해 1분기(12억3100만 달러)에도 전년 동기 대비 8.6% 늘었다.
일본 기업들이 한국 투자를 늘린 건 윈윈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등 세계 반도체·디스플레이 최강자가 있다. 한국은 응용기술, 일본은 기초기술에 강한 만큼 한·일 기업이 손을 잡으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1위 반도체 패키지 기판 제조사인 일본 이비덴그라파이트는 지난해 12월 경북 포항 영일만일반산업단지 내 공장에 650억원을 투자해 등방성 인조흑연 생산능력을 연 3600톤에서 5400톤 규모로 늘리기로 했다. 후지필름, 도레이그룹, 도쿄일렉트론, 동우화인켐, JSR마이크로 등도 지난해 한국에 직접투자를 늘렸다.
일본의 한국 직접투자는 1965년 수교 이후 2012년까지는 대체로 증가세를 보였다. 그러다가 2013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특히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반발해 일본 정부가 이듬해 반도체 등 제조에 필요한 3개 핵심 소재의 대(對)한국 수출 통제에 나서면서 양국 관계가 급랭했다.
수출 통제 이후 한국 기업들은 일본 소부장 업체의 한국 직접투자를 유도했다. 일본 기업들도 수출 통제를 피할 수단으로 한국 직접투자를 늘렸다. 모리타 기요타카 게이단렌 국제협력본부장은 “반도체는 양국이 서로 강한 분야가 다른 만큼 협력해서 윈윈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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