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周)나라의 발상지, 기산(岐山)

기호일보 2025. 7. 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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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용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초빙연구원
문승용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초빙연구원

제정일치의 신정사회였던 상(商)나라가 신의 계시로 세상의 정치를 이끌었다면 그 뒤를 이은 주(周)나라는 인간 문화 중심의 인문주의가 비로소 싹튼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문왕(文王)으로 추존되는 희창(姬昌)이 기획했고 그의 사후 아들인 희발(姬發)과 강태공 같은 이들이 상나라를 물리치고 주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주나라의 기틀을 처음으로 닦은 이는 문왕의 할아버지인 희단보(姬亶父)다. 그의 이름은 단 또는 단보라고 한다. 이때 '아비 부(父)'자는 고유명사일 때는 '보'라고 읽는다. 희단보는 주족(周族)의 우두머리로서 고공(古公)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흔히 고공단보(古公亶父) 또는 주태왕(周太王)이라고도 부른다.

고공단보는 태강(太姜)을 아내로 맞아 태백(太伯)과 우중(虞仲), 계력(季歷) 세 아들을 낳았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서쪽 지방의 유목민족인 훈육(薰育)이 자주 침략해 괴롭히자 고공단보는 그들을 피해 위하(渭河) 유역 기산(岐山) 기슭으로 백성들을 데리고 이주했다고 한다.

기산은 서안에서 서쪽으로 200㎞ 정도 떨어진 보계(寶鷄)시의 북쪽 야트막한 산이다. 이곳에서 고공단보는 주나라 건국의 터전을 닦았다. 그러나 오늘날 이곳에서 건국의 구체적인 자취나 유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독특하게도 고공단보는 주나라 종족의 우두머리 자리를 첫째 아들이 아닌 셋째 아들 계력에게 물려줬다. 「사기」에는 고공단보가 막내며느리인 태임(太任)이 장차 주나라 문왕으로 추존될 희창을 낳았을 때 상서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그가 장차 주나라 종족을 번성시킬 인물이라고 예견했다.

고공단보는 손자인 희창이 뒷날 주족의 우두머리 자리를 잇게 하려고 계력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자 첫째 태백과 둘째 우중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양자강 남쪽인 형만(荊蠻) 땅으로 이주해 가서 따로 자신들의 나라인 오(吳)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고공단보가 죽은 뒤 주나라 종족의 수장 지위를 물려받은 계력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정치를 폈으며 서북쪽에서 주나라 종족을 위협하던 유목민족인 융족(戎族)의 정벌에도 큰 공을 세웠다. 계력은 셋째 아들이었지만 자기 아들 덕에 종족의 수장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권한이 당연히 첫째 아들에게 계승돼야 한다는 전통이 확고하지 않던 때였다.

고공단보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계력의 자리를 이어받은 희창은 할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희창은 이미 운명을 다한 상나라를 물리쳐서 혁명을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아들인 희발(姬發)이 뜻을 이어받아 상나라를 무찌르고 주나라 건국에 성공했다. 희창은 실제로 왕에 오르지 못했지만 역사에서 그를 부르는 문왕은 그가 살아 있을 때 받은 칭호가 아니라 죽은 다음에 아들인 희발이 나라를 세우고 나서 아버지를 추존해 올린 시호다. 주나라를 실제로 건국한 희발의 시호는 무왕(武王)이다.

문왕과 무왕의 능은 할아버지인 고공단보가 주나라 건국의 기틀을 다졌던 기산 부근 함양시(咸陽市) 위성구(渭城區)에 100m 거리에 나란히 조성돼 있다. 그들 능의 아래 둘레는 약 300m이고 높이는 12m 정도로 규모가 그다지 크지는 않다. 주나라 건국의 일등 공신인 강태공의 묘도 부근에 있는데 봉분의 높이가 약 5m쯤 되는 데다 변변한 비석이 아닌 돌판에 '제태공(齊太公)'이라고 쓰여 있을 뿐이다. 지금은 바로 곁에 커다란 규모의 포도밭이 조성돼 있어 묘지가 잘보이지도 않는다.

실제로 강태공의 묘지와 사당은 주나라 건국 이후 분봉을 받았던 산동성(山東省) 성도(省都)인 제남(濟南)에서 약 100km 떨어진 치박(淄博)에 있다. 아마도 주나라 건국에 있어서 큰 공을 세운 강태공의 묘를 문왕과 무왕의 능 곁에 만들어 구색을 갖춘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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