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56) 여왕의 지혜

강시일 기자 2025. 7. 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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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의 지혜 모란에 향기가 없다, 여근곡에 숨은 백제군사, 자신의 무덤 도솔천 예언 등
선덕여왕이 죽고 30년이 지난 시점에 문무왕이 건설한 사천왕사의 서탑 기단의 복원한 모습.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지혜의 샘을 가진 군주로 다양한 역사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하는 모란에는 향기가 없다, 여근곡의 백제군사, 사천왕사 위의 도솔천 장례 등 세 가지 예지능력과 같은 지혜는 잘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 등에서 전하는 여왕의 세 가지 지혜는 놀랍다. 그러나 여인의 몸으로 사상 최초의 왕좌에 오른 일과 지금의 과학으로도 실현하기 어려운 황룡사구층목탑의 건설, 천년이 지나도 굳건한 첨성대 건설 등은 일반적인 지혜로는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일이다.

진흥왕의 정복전쟁에 대한 반발은 진지왕과 아버지 진평왕 대를 지나 여왕의 시대에도 끊임없이 이어져 백성들의 삶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삶은 극도로 피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왕의 지혜로 신라는 굳건하게 영토를 지키며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낭산 도리천에 잠든 선덕여왕의 무덤.

◆신화전설: 모란에는 향기가 없다

선덕여왕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했다. 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전국에 관리들을 보내 나라 안의 홀아비와 홀어미, 고아, 보살펴 줄 사람이 없는 노인, 혼자 힘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먹고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여왕에게는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려주는 세가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첫 번째는 여왕이 즉위하기 전의 공주시절의 이야기다.

당나라 황제 태종은 진평왕에게 희고 붉은 모란꽃 그림과 씨앗을 보냈다. 그러자 그 그림을 보고 덕만공주가 "아버님 이 꽃은 아주 아름다우나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옵니다"라고 했다.

왕이 "공주가 그것을 어찌 아는고"라며 신기한 듯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공주는 "꽃은 있으나 나비가 없으니 그렇습니다. 꽃이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꽃은 이리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꽃이 틀림없사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천왕사의 전경.

왕이 씨앗을 심게했더니 꽃이 피었다. 정말 향기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공주의 지혜로움에 감탄하며 칭찬했다. 이러한 공주의 지혜로움을 곁에서 지켜보던 진평왕도 공주의 통찰력에 감탄하면서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있었다. 이렇게 총명한 공주는 주변에서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며 나이가 들어 지혜로 선덕여왕이 됐다.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른 지 5년이 되던 해(636) 5월 여름, 궁궐 서쪽에 있는 연못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사나흘을 내리 울었다. 신하들이 이상하게 여겨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여왕은 "개구리는 성난 눈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병사의 모습이오. 우리나라 서남쪽 국경에 여근곡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곳에 분명 적의 군사가 숨어 있을 것이오. 각간 알천공과 필탄공은 잘 훈련된 병사 2천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을 조사하여 적병을 물리치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알천과 필탄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를 조사해보니 과연 부산성 아래 여근곡이라는 골짜기에 백제병사 5백명이 숨어있었다. 백제 장군 유소가 신라의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이끌고 온 무리였다.

알천은 기습공격을 퍼부어 이들을 모두 무찔러 잡았다.

병사들이 여왕의 지혜에 감탄하며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궁금해 했다. 여왕은 "개구리가 성난 모양으로 있는 것은 병사의 모습이요, 지금 옥문지는 얼음이 얼어 흰빛을 띠고 있으니 흰색은 서쪽을 말하니 백제 군사가 서쪽 여근곡에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라 설명해 여왕의 지혜에 백성들이 감탄했다.
선덕여왕릉 앞으로 펼쳐진 소나무숲.

◆흔적: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릉

신라가 당나라 군사들과 힘을 합쳐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당나라 소정방 군대는 철수하지 않고, 반도에 머물면서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를 넘보고 있었다.

김유신 장군과 문무왕은 당나라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대책을 마련했다. 김유신 장군이 상주 문경까지 올라가 소정방 군대를 맞이하며 환영하는 척 하다가 당교에서 독으로 당군을 몰살시켰다.

당나라는 이를 계기로 50만 대군을 파병해 신라를 응징하려 했다. 이때 당나라에 유학 중이던 의상대사가 황실에 억류돼 있던 김인겸으로부터 정보를 전해듣고 황급히 신라로 돌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문무왕이 대책을 묻자 명랑법사를 추천했다. 명랑법사가 사천왕사를 지어 법의 힘으로 적을 무찌를 수 있다고 대답했다.
선덕여왕이 예언해 백제군사를 잡은 여근곡.

왕명을 받아 명랑법사가 사천왕사 건설을 서둘렀다. 그러나 절을 짓기 위해 주춧돌도 놓기 전에 이미 적군은 바다를 건너고 있다는 첩보가 당도했다. 절을 짓기도 전에 적으로부터 나라가 쑥대밭이 될 지경에 처한 것이다. 명랑법사는 할 수 없이 비단으로 벽을 치고, 5방에 신상을 세운 뒤 유가명승 12인과 더불어 문두루비법을 시전해 당의 50만 대군을 수장시켰다.

문무왕이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어 선덕여왕이 잠든 곳은 자연스럽게 사왕천의 위에 있다고 전하는 도리천이 됐다. 문무왕이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을 때는 선덕여왕이 647년 죽음에 이르고 30여년이 지난 시점이다. 선덕여왕은 이미 30년 밖의 일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의 마지막 지혜의 발현을 천년이 지나도록 대대손손 눈으로 보고 있다.
백제군사들이 숨어있었던 여근곡의 옥문지.

◆스토리텔링: 도솔천에 장례를 치르라

선덕여왕은 40대 후반에 즉위해 고구려와 백제, 왜구 등의 파상적인 공격과 귀족들의 세력싸움을 견제해야 하는 입장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건강 악화의 삼중고를 감당해야 했다.

여왕은 이러한 삼중고의 고난을 극복하는 방법을 불교라는 하나의 창구를 선정해 어둠을 해소하는 불을 밝혀나갔다. 이러한 길을 가는 동반자로 자장율사와 같은 인재를 기르고, 분황사, 영묘사와 같은 칠처가람을 건조해 백성들의 마음에 평화를 심어주는 텃밭으로 삼았다. 특히 첨성대를 축조한데 이어 황룡사구층목탑을 쌓아올려 국제적인 위상을 드높였다.

첨성대는 천기를 살피면서 1년 내내 순환되는 절기의 특성을 살펴 농사법을 과학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하고, 군사적인 전략에도 적용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천기를 살피기 위해 지혜로운 여성을 천관으로 발탁해 세밀하게 절기별 기후의 변화를 기록하게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계절적으로 쏟아지는 폭우와 더위, 서리가 내리는 상강 등의 일기를 헤아려 풍년농사를 견인했다. 군사들의 운용도 계절에 맞춰 병사들이 지치지 않고 사계절 내내 적절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여왕은 또 세력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인재를 등용하는 인사정책을 쓰면서 김유신 장군과 같은 가야출신, 폐위된 왕의 후손 김춘추와 같은 특출한 능력을 가진 인물들을 중용해 내란을 차단하고, 삼국통일로 가는 길을 차근차근 마련했다.
선덕여왕이 김유신 장군과 김춘추에게 반란군 비담을 잡으라고 명령하는 장면을 인공지능 AI가 그린 그림.

그러나 말년에 인재 등용에 실패해 병이 깊어지면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우를 남기고야 말았다. 김춘추와 김유신을 외곽에 비치하고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했던 것이 절대적인 실책이 되어버렸다. 상대등에 오른 비담은 여왕이 나이가 들어 숙환을 앓게 되자 권력에 대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왕이 인품이 뛰어난 사촌여동생이었던 승만을 차기 여왕으로 내정하자 비담은 염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왕권을 탈취하려 했다. 여왕의 명을 받은 김유신은 김춘추에게 여왕의 주변을 지키게 하고, 명활산성에 진지를 구축한 비단세력을 사방에서 압박해 생포하고, 전정에서 처형했다.

여왕이 어느 날 신하들에게 "내가 정미년(647년) 정월 초여드렛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에 묻도록하시오"라고 했다. 신하들은 도리천이 어디인지를 몰라 민망해 하며 "도리천이 어디시온지요"라고 물었다. 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라고 대답했다.

선덕여왕은 신기하게도 스스로 예언한 대로 그 날짜에 세상을 떠났다. 신하들은 낭산의 햇볕이 잘 드는 곳을 골라 장사를 지냈다.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30여 년이 지나 문무왕이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불경에 사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은 뒤에 사천왕사가 들어설 것이라는 사실까지 미리 짐작하고 무덤 자리를 정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이렇게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뛰어난 군주였다는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증명이 됐다.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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