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은 엄마와 편지 쓴 딸 [한겨레 프리즘]


정혁준 | 전국팀장
영국 정치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1859)에서 사상·표현·양심·집회·결사와 관련해 개인은 무한한 자유를 가진다고 했다. 하지만 밀은 이런 자유도 제한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경우다. 이를 ‘해악의 원칙’(the harm principle)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는 건 개인의 자유지만, 술에 취해 다른 사람을 폭행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다.
밀이 주장하는 자유의 기본 원칙은 한마디로 ‘개인은 마음껏 자유를 누려라. 다만 그 자유가 남에게 피해가 돼서는 안 된다’로 정리할 수 있겠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런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를 흔히 본다. 대북·대남 방송이 그랬다. 민간단체가 대북 전단을 뿌리는 데 맞서, 북한이 오물풍선을 날리고, 이에 남한이 대북 방송을 틀자, 북한은 대남 방송으로 맞대응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에서 가장 피해를 본 사람은 접경지에 사는 주민이었다.
지난해 10월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강화도 주민 안미희씨는 “진짜 이렇게 무릎 꿇고 싹싹 빌게요”라며 증인으로 나온 국방부 관계자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안씨는 “아이들이 ‘엄마가 국회에 가면 내일부터는 (대남) 방송이 안 나오는 거냐’고 물어봤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북한이 내보내는 소음은 해가 질 무렵인 저녁 7시쯤 시작해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이어졌다. 울음소리, 쇠 긁는 소리, 귀신 소리 같은 기괴한 소음이었다. 이런 소음에 평온한 일상을 빼앗긴 주민들은 대북 전단 살포가 고통을 더한다고 호소했다. 안씨는 “탈북민 단체들이 페트병으로 전단을 보내고 나면 북한 방송 소리가 서너배는 더 커진다. 제발 강화에서 전단을 못 보내게 해달라”고 했다.
누군가의 자유는 누군가에겐 고통이 됐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누군가는 끊어야 했지만, 남한 정부도 북한 정부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 이재명 대통령 지시에 따라 군당국은 지난달 11일 대북 확성기 방송을 멈췄다. 북한도 다음날부터 대남 소음 방송을 중단했다. 지난달 12일 오전 한겨레 이승욱 기자가 찾은 인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마을회관은 북한이 대남 방송을 중단한 뒤 활기찬 분위기였다고 했다. 당산리 부녀회장 채강순씨는 “그동안 들리던 대남 방송이 안 들리니까 오히려 어색하더라”며 농담을 던질 정도로 즐거워 보였다고 했다. 채씨는 “그동안 여기 주민 대부분이 대남 방송으로 밤에 잠도 못 자서 수면 부족 상태였다. 약을 타 먹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며칠 뒤 강화도에 사는 한 아이 얘기가 들려왔다. 국감에 나왔던 안씨의 딸이었다. 딸의 그림편지가 관심을 모았다. 지난해 10월 딸이 그린 그림편지를 보면, 산 위에는 큰 확성기가 그려져 있고 도로 위 자동차는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그림엔 “소리 그만”, “저 소리 힘들어요”라는 말이 곳곳에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 공개된 딸의 그림편지는 달랐다. 산 위에는 여전히 확성기가 그려져 있었지만, 옆엔 음표가 달려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황을 그림에 담은 듯했다. 산 밑엔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데 이전과 달리 웃는 모습이었다. 돌아온 일상을 그린 듯했다.
지난해 7월부터 1년 동안 대남 방송으로 고통받아온 접경지 주민의 삶이 안씨 딸의 그림처럼 평온을 되찾기를 바란다. 앞서 지난해 6월 윤석열 정부가 대북 방송을 시작하자 북한도 대남 방송으로 맞서면서 접경지 주민은 그동안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2022년 5월 취임사에서 당시 윤 대통령은 ‘자유’를 35번 강조했다. 대통령 후보일 때도 밀의 ‘자유론’을 ‘인생의 책 또는 젊은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으로 꼽기도 했다. 그가 다시 한번 ‘자유론’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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