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500] 전통 예술의 산실 ‘神廳’<신청>
호남을 예향(藝鄕)이라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 그 예향의 뿌리는 두 가닥이다. 하나는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의 초의선사에서 진도 운림산방의 허소치로 이어지는 고급 문화의 맥이다. 또 하나는 판소리와 가야금 산조의 명인들을 배출한 나주의 ‘신청(神廳)‘이다.
나주의 신청문화관에서 윤종호(55)라는 ‘신청’ 전문가를 만나게 되었다. 전남대 국악과를 나와 판소리를 했고, 이 특수한 분야의 고구마 줄기를 10여 년간 추적해온 인물이다.
“왜 이름에 귀신 신(神) 자가 들어가는가?”
“무당들의 연합체였고 관의 관리하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나주 관내의 남자 무당(巫夫)들이 나주 신청 소속이었다.”
1930년대 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70여 가구가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조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많았다고 추측된다. 말하자면 신청은 공인 라이선스를 가진 전국적인 무당들의 조직이었다. 남편이 무부(巫夫)이면 그 부인도 당연히 무당이었고 거의 세습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일반 민간인들에게 푸닥거리 굿을 해주는 일이 주 수입원이었다. 그리고 수입의 일정 액수를 관아에 세금으로 바쳤다. 공식적인 무세(巫稅) 납부였다.
무부들 가운데 일부는 악기를 다루는 악공(樂工·연주자)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당시 삼현육각 편제로 운용되던 관속 밴드의 일원으로 피리, 젓대, 해금 등을 연주했다. 나주목사나 귀인들의 영접 행차, 금성산신제, 망궐례와 같은 공식 행사에 동원됐다. 나주읍성 상층 부녀자들이 돈을 대는 마을 축제 ‘삼색유산’에도 참여했다. 그런가 하면 동학혁명 때는 이 남자 무당들이 ‘재인부대(才人部隊)’라고 해서 관군에도 편입되어 있었고 그 반대편인 동학군에도 가담하고 있었다. 전투에서는 요란하게 북과 징을 치고 나발을 불면서 사기를 높이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취타수로서 군역을 치르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일에 가장 특화된 적임자들이었다.
무당 신분은 최하층 천민 대접이었다. 조선 왕조가 망하고 일제가 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신청의 후예들로 나주의 이름난 예인들은 가장 큰 소비 시장인 서울로 갔다. 해방 전까지 명창들이 레코드를 취입하기도 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돈과 명예를 거머쥐었다. 해방 후 젊은 사람들은 이북으로도 몰려갔다. 이북으로 올라가서 인민배우가 되었던 안기옥(1894~1974)은 나주 남평읍 출신이었고, 정남희(1905~1984)는 나주 다시면 출신이었다. 모두 가야금의 명인들이었고, 윗대는 나주 ‘신청’ 소속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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