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밖 희귀 캐릭터들, 풍성하고 격이 다른 이야기
- 복수 다짐 테러리스트 로푸심
- 무욕과 탈속의 협객 문창곡
- 양심·정의 외친 지식인 송남수
- 나림 분신으로 나온 이동식
- 이들은 단순무식 이종문 곁에서
- 좌충우돌 행적 브레이크 걸고
- 때론 올바른 길로 이끄는 역할
- 1920년대 日식민지 시대 딛고
- 세상 이끈 세대를 향한 헌사
희귀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다. 희귀한 품성을 지닌 사람도 있다. 나림 이병주는 희귀한 인물을 좋아했다. 그 자신, 희귀한 인물이다. 대하소설 ‘산하’는 희귀한 인물 열전이다. 희귀한 인재는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나 귀하다. ‘산하’에 그들이 있다.
‘산하’가 남긴 기막힌 아포리즘이 있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나림은 희귀한 자질과 품성을 가졌으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을 어스름 달빛에라도 비추어주려 했다. 테러리스트 문창곡과 로푸심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해야 할 일이니까 애써 하는 양심가 정치인 송남수와 비판적이지만 반듯한 철학자 이동식도 그런 인물이다. 단순무식한 이종문의 좌충우돌 행적에 때로는 브레이크 역할로 때로는 향도(嚮導) 역할로 대하드라마 ‘산하’를 풍성하고 격 있게 하는 캐릭터들이다. 다 실존 모델이 있는 인물들이다.
▮협(俠)의 기상 어린 소설
나림 작품엔 테러리스트가 많이 등장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황제의 절대권력 군권(君權)과 재야 유협(遊俠)의 협권(俠權)을 병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복수의 정열은 소중한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나림은 로푸심의 협기(俠氣)를 상찬하고 테러를 긍정한다. 로푸심은 등장부터가 드라마틱하다. 8·15 1주년 행사가 좌우로 갈라져 따로 열리는 날, 서울 시내는 땀과 함성과 다툼으로 요란했다. 현실에 무심한 듯 북악산 계곡에 오른 로푸심은 정한(精悍)한 무술을 다듬는다. 오로지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한 준비다. 부친은 성공한 실업가였으나 중국에서 동포 마약상 밀정에게 처참하게 살해된다. 그 밀정은 해방 후 귀국하여 은신한다. 로푸심은 기어이 찾아내 복수하고 시내 한복판에 죄상을 적은 팻말과 함께 시신을 전시한다.
갚음, 보(報)는 사람살이의 기본이다. 은원은 갚아야 한다. 은인에겐 보답해야 하고 원수에겐 복수해야 한다. 로푸심의 인생, 그 깊음을 위한 삶이다. 갚음은 성공한다. 다만 이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로푸심은 미국 홍콩 대만을 떠도는 노마드로 산다. 그가 마지막으로 의미를 찾은 건 북악산에서 만났던 친구 이동식의 안온한 가정을 지켜주는 일이다. 우정과 조국을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봉사라는 명분으로 로푸심은 인천상륙작전의 전초부대를 지휘하다 월미도에서 산화한다.
문창곡은 협객이다. 협객 양근환을 도와 ‘혁신 탐정사’를 운영한다. 김두한이 형님으로 모시고 장택상 조병옥이 함께 일하자고 권유하지만, “욕심도 독기도 없는 호인”이다. 경찰서장에 추천하려 해도 재야가 편하다며 출사를 거절한다. 늘 장기를 두는 상대에게 세 수든 다섯 수든 물려달라는 대로 물려준다. 금전에도 무심하다. 탈속과 허무가 몸에 배어있지만 따듯하다. 도저히 테러리스트 같지 않아 이종문이 술기운을 빌려 테러에 대해 묻는다.
문창곡은 “가치가 제대로 보람을 다하지 못하는 사회에선 테러가 필요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죽어줘야 할 사람이 있다. 다만 대의를 위해 죽일 작정을 한 사람은 자신도 죽을 각오를 한다. 내 생명과 그 생명을 상쇄한다는 뜻이다.” 문창곡은 테러가 성사되고 자신은 용케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건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며 아무런 야심과 악의 없이 적덕(積德)하며 지낸다. 그런 희귀한 인물이 6·25 전쟁 중 공산군에게 잡혀 처형된 양근환과 같은 신세가 된다.
송남수는 “군자는 때를 얻으면 수레를 타는 귀한 몸이 되지만 때를 얻지 못하면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인물이다. 머리 좋은 건달이 주도하고 수기응변(隨機應變)에 능한 꾀돌이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양심적인 먹물이 설 자리는 딱히 없다. 난세는 당위(當爲)가 아닌 실존만이 발언하는 시대다. 송남수는 게릴라식 생존 본능이 번득이는 공간에서 양심과 정의를 외는 외톨이다. 니체가 사랑했고 나림이 애틋하게 여긴 “힘에 겨운 일을 하다가 좌절한 인물”의 전형이다.
송남수는 김구 김규식을 수행해 남북협상에 참여한 송남헌이 모델이다. 여운형의 지우를 얻었고 최근우 엄항섭 등 좌우에 걸쳐 동지가 많았던, 시대의 지성이다. “정의엔 양쪽에 꼬리가 달려있다. 힘이 센 쪽으로 끌려간다”는 세태에 송남수는 번번이 힘이 약한 쪽으로만 힘을 보태니 고달프다. 이종문은 그나마 힘이 센 쪽으로만 붙어 10년 영화를 누린 탓에 4·19와 5·16 후 몇 년 수감생활이 억울하지만은 않다. 만개했던 꽃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감수한다. 하지만 송남수가 번듯한 보람 한번 없이 이종문보다 더 오랜 영어(囹圄) 생활을 한 건 현대사의 비극이다.
▮3·15의 현장감
소설 끄트머리 3·15 시위 현장에서 이종문이 당하는 난리는 리얼리티가 강렬하다. 선거 결과엔 무관심한 채 ‘음식남녀(飮食男女)’에만 집중하는 현직 의원 이종문이 오동동 기생집에서 겪는 난리는 블랙 코미디다. 모든 기생이 시위하러 나간 텅 빈 술청에 앉아 있다가 허둥지둥 도망가는 모습이 ‘웃프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영화 부귀의 한 정점에서 순식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대목도 실감이 나지만 경찰과 학생 시민 그리고 기자가 엉킨 현장의 묘사가 박진감 넘친다. 나림이 편집국장으로 지휘한 국제신보(현 국제신문) 기자들의 목숨 건 취재와 기록 덕분이다.
이동식은 나림의 분신이다. 쑤저우에서 학병으로 복무한 경력, 상하이에서 이상정 장군 등 애국자와 장병중 등 애국자연(愛國者然) 하는 밀정을 만난 일, 승려 출신 정치인 김법린과 인연, 좌우 투쟁에서 좌와 우를 아우르려다 양쪽에서 다 돌을 맞고 고초를 당하는 경우 등 나림의 경험이 상당 반영되어 있다. 기막힌 인물 4인은 무식쟁이 잡놈 이종문이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에 향도 역할을 한다.
로푸심은 채찍을 휘두르고, 문창곡은 푸근한 형님처럼 감싸며 이끌어준다. 겁 없는 이종문에게 유일하게 무서운 사람이 로푸심이다. 세상에 대통령 ‘아부지’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이종문으로서도 미스터리다. 생사를 쥐고 흔들었던 그 눈빛과 무술이 당장 두려운 것이다. 이동식은 망년지우(忘年之友)로 좋으나 궂으나 늘 옆에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충고한다. 부드러우면서도 꺾이지 않는 옥인(玉人)이다. 송남수는 연적(戀敵)으로는 라이벌 의식을 느끼지만 고상함과 지성을 배우고 싶은 선생이기도 하다.
이종문의 폭풍 성장은 물론 이승만 ‘아부지’ 덕택이 결정적이지만, 인간적 성숙은 이 네 사람의 향도를 기꺼이 따른 결과다. 이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외면하면 그만이고 이들의 의견이 아무리 시의적절하고 반듯해도 경청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하지만 이종문은 흔쾌히 충고를 듣고 기꺼이 교제를 이어간다. 그 넉살과 비위 그리고 심태(心態)는 이종문만이 가진 장점이다. 쉽지 않은 내공이다. 물론 이종문의 축첩과 뇌물수수 그리고 이승만 정권 연장을 위한 막무가내 행태 등 때문에 우정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우정은 우정, 노선은 노선 그리고 인간적 결점은 결점이다. 노선 차이와 인간적 결점마저 품는 게 우정이기도 하다.
▮부끄러웠던 이유
나는 진화를 믿지 않는다. 진화는커녕 오히려 퇴화해 가는 것 같다. 적어도 나의 세대가 부모 세대만 못한 건 틀림없다. 1920년대에 태어나 식민지 시대를 겪고 해방정국과 전쟁을 이겨냈으며 폐허에서 유(有)를 만들어낸 부모 세대는 그 모진 세태에서도 정이 있고 품이 컸었다. 못 살았어도 뜨듯함이 있었고, 나아질 것이란 기대와 희망이 있었다. 우리는 묵묵히 힘든 세월을 이겨내신 부모 세대를 존경하며 자랐다.
‘산하’를 읽는 내내 나는 부끄러웠다. 세대 탓 남 탓 할 것 없다. 나의 각박함과 왜소함만 걱정하면 된다. 나림이 ‘산하’에서 그린 인물 열전, 하잘 데 없는 나의 문제에 매몰되어 너른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좀스러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통렬한 자극이다.
아! 그립다. 기인(奇人)과 대인의 시대. “살아 있는 사람은 일단 산을 내려가야 한다. 이 땅에 생을 받은 사람이라면 좋거나 나쁘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모두 이 산하로 화(化)하는 것이다.” 나림의 실록 대하소설 ‘산하’ 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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