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울산여지도] 울산에서 만나는 한반도 선사시대
생생히 드러난 해양인류 문화
한반도 고대사의 두번째 기적

# 신암에 묻혀 있던 두번째 기적
선사유적에 대한 연구가 어설프게 진행된 울산은 사실 고고학계의 보물창고다. 문제는 그동안 선사유적의 보물창고인 울산을 학술적 가치를 가진 곳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우리의 고고학은 왜인들의 날조된 역사관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고대사 날조 등 비극을 낳았다.
일제가 한반도를 뒤지며 발견한 것은 한반도 문화의 우수성과 왜의 대륙문화 유입설이었다. 부인하고 싶고 부인해야 했던 왜의 역사학자들은 조선인 학생들에게 잘못된 한반도의 고대사를 전수했고 그들이 해방 후 강단 사학의 주류가 됐다. 이런 사정이다보니 울산은 제대로된 고대사의 탐구현장이 되지 못했고 1990년대까지 고대사, 아니 선사문화의 불모지로 남겨져 있었다. 여기에 1962년 울산의 특정공업센터 지정은 울산의 정체성을 공업도시로 굳히는 결정적 사건이 됐다.
그렇게 흘러간 수십년의 세월 뒤에 놀랍게도 오랜 시간 묻혀 있던 한반도 역사의 초기 모습들이 울산의 땅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난 칼럼에서 울산에서 만난 첫 번째 선사의 기적을 이야기 하면서 밝혔듯 울산은 고대사의 기적이 연속되는 땅이다. 울산여지도가 오늘 그 두 번째 기적의 현장을 찾았다. 바로 울산 땅의 남쪽 끝 신암이다. '신암리 비너스'로 불리는 여인상은 서생 신암리에서 1974년에 발굴됐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선사시대 여인상은 울산 신암리와 함경북도 청진 농포 패총에서 확인된 단 두점이 유일한 유물이다. 탄소연대측정 결과 신암 비너스의 제작연대는 신석기 시대다.
여인상의 발굴이 두 번째 기적인 이유는 단순한 유물의 출토가 아니라 선사문화의 전반적인 모습을 유추하게 하는 엄청난 문화적 자산이라는 점 때문이다. 지금은 국내외 문화유산 관계자들이 울산의 반구대암각화를 세계유산 목록에 올려 공식 등재 절차를 밟고 있지만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우리 정부기관조차 울산의 문화유산을 홀대했다. 반구대암각화를 당장 세계문화유산 우선등재 목록에 올려 체계적인 보존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역언론이 목청을 높였지만 정작 우리 문화유산 관리자들은 반구대암각화의 세계유산 점정목록 등재 조차도 미루는 잘못을 저질렀다.
대한민국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의 지난 과오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지만 서류만 쳐다보는 이들이 지금은 반구천의암각화를 떠받들고 있는 것이 참 이중적이라는 느낌이다. 한반도 선사문화에서 반구대암각화가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핵심은 뿌리에 있다. 반구대암각화는 무엇보다 한반도 인류의 뿌리를 웅변하는 증거물이다. 그 실증적 증거물은 반구대암각화 발견 이후 계속해서 울산 땅에서 드러났다. 바로 그 두번째 기적이 신암과 울산 동해안에서 드러난 석기시대의 유물이다.
# 문화유산마저 홀대 당한 울산
앞서 지적한대로 문화재 당국의 울산에 대한 태도는 거의 만행에 가깝다. 울산이 가진 엄청난 선사유물의 가치는 안타깝게도 우리 문화재 당국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한반도 최고의 보물인 반구대암각화를 제대로 연구하고 관리하며 보존하려는 노력은 당연히 국가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국은 반구대암각화 발견 이후, 국보지정과 관리 감독에 손을 놓아버렸고 20여년의 세월동안 수많은 탁본과 지질연구 등으로 두들김과 망치질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에게 학습한 한 원로 학자의 반구대암각화 학술연구를 텍스트로 삼아 교과서에 기록하고 이를 마치 사실인냥 학교 교육에 반영했다. 왜곡된 연구자의 텍스트는 반구대암각화의 제작 연대를 청동기 시대로 늦춰잡았고 고래사냥과 고래다양성에 대한 연구는 첫장도 쓰지 못했다.
심지어 일부 학자라는 사람들은 반구대암각화를 두고 고대 울산지역에 고래사냥은 없었고 죽은고래로 제를 올린 의식만 있었다는 엉뚱한 연구발표로 학위를 받는 일도 생겼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초창기 연구자들은 반구대암각화의 바위면이 돌칼로 충분히 새김질이 가능한 석질이라는 사실도 모른체 철제로 쪼아 그린 암각화라 규정했고 이를 제도권 사학계가 정설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그런 자들이 지금은 태도가 돌변해 반구대암각화를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이라고 떠받들고 있다. 한반도 지역의 신석기유적이나 유물이 고고학계에 보고되기 시작한 것도 따지고 보면 얼마 되지 않은 일천한 역사를 가졌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시작된 어용 일본 학자들에 의한 한반도의 고고학적 발굴이 임나일본부설을 짜맞추기 위한 고분 발굴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의 선사 고고학은 선사시대나 역사시대의 구분이나 체계적 발굴 등의 학문적 일정표는 염두에 없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울산의 선사시대 유물에 대한 조사와 발굴은 더 열악한 형편이었다. 애초에 고고학계에서는 울산을 경주의 한 변방으로 보고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1970년과 1971년 겨울, 대곡천에서 암각화가 쏟아졌다.
암각화 발견 이후 전국의 대학 사학과나 고고학과, 인류학과 등은 울산에 주목했다. 1970년대 이후 울산은 산업화의 기수로 근대화의 첨병으로 내달린 시절이지만 한편에서는 땅을 파고 뒤지며 선사의 흔적을 찾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해안가에서 석기유물이 쏟아졌다. 서생 신암리다.
신암리는 신석기시대 유물인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곳이라 일찍부터 취락이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대체로 신석기시대의 조각품으로 추정되는 이 여인상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유물이다. 지구상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석기시대 여인상은 거의 없다. 신암리 비너스상의 경우 흙을 빚어 만든 것으로 몸체만이 남아 있다. 허리가 들어가고 왼쪽 가슴이 솟아 있어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물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뚜렷한 선사의 상징물은 바로 울산 땅에 모여든 사람들이 한반도 인류의 원형이었음을 묵시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김진영 편집국장·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