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수 박사의 조선왕릉이야기] 13. 아비의 업보를 뒤집어쓴 비운의 의경세자의 경릉(敬陵)


조선왕릉에는 추존 덕종의 의경세자 경릉(敬陵), 추존 원종의 정원군 장릉(章陵), 추종 진종의 효장세자 영릉(永陵), 추존 장조의 사도세자 융릉(隆陵), 추존 문조의 효명세자 수릉(綏陵) 등 추존릉 5기가 있는데, 경릉이 최초의 추존 왕릉이다. 조선왕릉 '형태' 편(4회)에서 이야기되었던 음의 공간인 음택은 뒤에서 보았을 때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이 적용되어 서열이 높은 오른쪽이 왕의 자리이고, 왼쪽은 왕후의 자리이다. 동원이강릉도 마찬가지이다. 뒤쪽에서 볼 때 우상좌하의 원칙이 적용되어 오른쪽이 남자, 왼쪽이 여자 자리인 것이다. 그러나 경릉은 이 원칙에 준하지 않고 소혜왕후가 오른쪽, 의경세자가 왼쪽에 있다. 이는 세자보다는 대왕대비의 서열이 높아 왕후 능을 오른쪽에 조성하였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왕후 능 조성 시 세자 능 왼쪽 언덕은 지형적으로 능을 조성할 환경에 적합하지 않아 오른쪽에 조성하였을 것이라 본다. 어쨌든 경릉을 보면서 왜 우상좌하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해소되었으리라 본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은 동원이강 형태의 의경세자 능은 작은 봉분에 석양 한 쌍, 혼유석, 장명등, 문인석과 석마 만을 갖춘 대군에 준하는 묘로 너무 간소하게 조성되어 있고, 소혜왕후 능은 왕의 릉에 준해 모든 석물과 병풍석, 난간석 등을 갖추며 화려하게 조성되어 있다. 이는 조선 최초 세자 묘를 조성하는데 아버지 세조는 당시 단종 유배 등의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간소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경세자 사후 부인인 소혜왕후는 의경세자보다 47년을 더 살면서 1504년 67세 사망하기까지 왕실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경릉은 세자보다는 성종의 어머니이자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로 알려진 왕후가 중심이 된 능이다.

세조는 의경세자가 즉위 3년 만인 19세에 요절하자 아들의 터를 잡기 위해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이순지(李純之), 정식(鄭軾), 방문중(房文仲), 강맹경(姜孟卿), 황수신(黃守身), 구치관(具致寬), 권지(權摯)와 필선(弼善), 임원준(任元濬) 등의 대신과 풍수학자 안효례(安孝禮)에게 헌릉, 건원릉, 과천, 고양, 양주, 경기도 광주와 원평, 교하, 용인, 양근, 미원, 동소문 밖의 감산, 풍양 토원 등을 살피고 조사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섯 번이나 친히 거동하는 등 풍수적으로 길지를 찾기 위해 한 달 이상 애를 쓴다. 세조는 현재의 압구정동 신사중학교 인근인 한강 건너 동쪽 언덕 사평원(沙平院)은 주맥(主脈)이 어지럽게 흩어져서 기운이 귀하지 않아 쓸 수 없다고 하였고, 과천 인덕원(仁德院) 동쪽을 보고는 좌우 용호(龍虎)인 청룡과 백호가 돌아앉아 쓸 수 없고, 현재 파주인 원평(原平)은 좋지만 금년에 쓸 수 없다고 풍수학자 안효례가 말한다. 현재 혜화동인 전간(箭干)은 간산이 마음에 들지 않고, 현재 남양주인 풍양(豐壤) 토원(兔院)도 마음에 들지 않아 원평으로 정하고 역사를 시작하나 터가 협소하다고 10월 11일 중지시킨다. 10월 13일 늦은 밤에 강맹경 등이 돌아와 고양 동쪽에 묫자리가 있다는 보고를 듣고, 다음 날 거동하여 안산에 올라 산세를 관찰하고 '곤산(坤山)이 간산(艮山)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에 흡족해하면서 향배(向背)를 정하였다. 9월 2일 사망 후, 10월 14일에 지금의 터인 고양에 택지를 하고 11월 18일 발인을 한다. 의경세자의 자리는 용맥과 수세가 좋으며 특히 안산이 매우 좋다. 큰길 건너 정능골 우측 뒤(현 용두동 산 46-2)에 위치한 산이 거리가 다소 멀지만, 입체를 이루고 밀고 들어오는 안산이기에 현무정과 조화를 잘 이룬다. 소혜왕후 능은 지나가는 용맥을 안산으로 하고 있어 안산의 반에너지를 공급받기 어려워 전순이 부실한 혈장이다. 심혈을 기우러 터를 정한 세조는 묘는 간소하게 하라는 지침을 두 번이나 명한다. 9월 7일과 10월 24일에 국장도감에 세자 묘의 석물을 간단히 하라는 어찰을 내리는 내린다.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457년 10월 24일 기록을 보면 조묘 도감(造墓都監)에 전지(傳旨)하기를 "세자묘에 석실(石室) 및 석상(石床), 장명등(長明燈), 잡상(雜像)은 아울러 예(例)에 의하고, 사대석(莎臺石) 및 삼면석(三面石)과 석난간(石闌干), 삼개체(三䃈砌)는 설치하지 말라." 하였다.
전(前) 편 사릉에서 단종비 정순왕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펴보았다. 정순왕후 송씨와 추존 소혜왕후 한씨는 세종의 손녀 며느리들로 둘은 사촌 동서이자 동시대에 살았던 왕실의 여자들이다. 하지만 둘의 인생은 닮은 듯 닮지 않고, 다른 듯 같은 점이 너무 많다. 단종비 정순왕후는 지아비 단종 사망 후 폐서인이 되어 64년을 생계를 위해 염색업을 하며 고된 삶을 살았다면, 추존 왕비인 소혜왕후는 지아비 의경세자 사망 후 48년을 왕(세조)의 며느리, 왕(예종)의 형수, 왕(성종)의 어머니, 왕(연산군)의 할머니로 온갖 영예를 누리며 살았다. 또한 영광과 함께 손자인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맞는 치욕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