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이효석문학상] 헬스장서 만난 남자가 엽서 한 장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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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그를 만난 곳은 헬스장이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녀가 남자의 엽서를 해독한 건 그에게 딴마음을 품어선 아니었다.
휘갈겨 쓴 엽서 문장을 외국어 공부하듯이 읽으면 한때 '나'였던 것이 그녀 삶을 다시 휘감았고, 그래서 삶을 다시 살아가게 했다.
"남편이 알았다면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탓했을 게 뻔한 이 일에 그녀가 흥미를 느낀 건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엽서를 읽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상실했다고 여겼던 자신을 거듭 되찾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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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색되고 뭉툭해진 엽서 읽으며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는 한 여성
뻔한 일상과 이상적 삶 갈등 담아
그녀가 그를 만난 곳은 헬스장이었다. 때늦은 로맨스 따위를 상상한 건 결코 아니었다. 마주치면 스쾃 자세를 조언받고, 지나가다 스치듯 러닝화를 추천받는 정도였다. 뜻밖에도 남자가 해외에서 구매한 '빈티지 엽서'를 내민다. 남자는 이국땅의 언어가 적힌 해외 엽서 수집이 취미였다. 운동이 끝나고, 한때 통역사를 꿈꿨던 그녀는 남자에게 엽서 글귀를 독해해준다. 지금은 낡은 자전거 가게에서 '중국산 고춧가루'를 팔지 말지 고민하며 살지만.
제26회 이효석문학상 최종심에 진출한 김혜진 소설가의 단편 '빈티지 엽서' 줄거리다. 겉보기에는 위험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주인공 '그녀'가 처한 상황을 통해 모두가 잃어버린 '나'를 되묻는 작품이다.
소문은 예감처럼 빠르게 퍼진다.
자전거 가게에 온 지인이 말한다. "어떤 남자랑 카페에 앉아 있던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노인은 말투부터 차갑다. "같이 다니는 그 아저씨, 식구 아니지요?" 급기야 헬스장엔 경고문이 붙어버렸다. '헬스장은 운동하는 곳입니다. 운동만 하세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녀가 남자의 엽서를 해독한 건 그에게 딴마음을 품어선 아니었다. 휘갈겨 쓴 엽서 문장을 외국어 공부하듯이 읽으면 한때 '나'였던 것이 그녀 삶을 다시 휘감았고, 그래서 삶을 다시 살아가게 했다. 빛바래고, 뭉툭해지고, 번지기까지 한 빈티지 엽서는 그녀 자신의 초상이었다. "남편이 알았다면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탓했을 게 뻔한 이 일에 그녀가 흥미를 느낀 건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엽서를 읽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상실했다고 여겼던 자신을 거듭 되찾는 기분이었다."
왜 자전거일까. 어린이용 자전거, 성인용 자전거, 크기가 다른 휠과 비품이 매장에 질서정연하게 진열돼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페달을 밟을 그 시간에, 그녀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30년을 흘려보냈다. 펑크 난 타이어처럼 제자리에서.
소설은 이 질문까지 나아간다. '우리가 일상을 떠나지 못했던 건 사소한 용기조차 갖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면 더 큰 용기를 갖고 일상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었을까?'
심사위원 이지은 문학평론가는 "그녀가 빈티지 엽서를 읽으며 타인의 삶(발신인과 수신인)을 독해하는 건 그녀 자신의 삶도 독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상을 지키는 삶의 이유를 환기해주는 작품"이라고, 심진경 문학평론가는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그리움과 뻔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에 발목 잡힌 삶 사이에서의 갈등을 한 여성을 통해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고 평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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