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운동의 기억으로 다시 읽는 통일벼 신화

김병수 2025. 7. 6.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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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문화] 빈곤탈출의 상징이자 과학의 승리로 간주되는 '통일벼'
1967년 출범한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은 제주대학교 최초의 법정연구소라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 특히 학술지 '탐라문화'는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재지 선정,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선정 등 제주에 대한 연구를 세상을 알리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다. [제주의소리]는 탐라문화연구원과 함께 '탐라문화' 논문들을 정기적으로 소개한다. 제주를 바라보는 보다 넓은 창이 되길 기대한다. 연재분은 발표된 논문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제막식을 앞둔 녹색혁명 성취 기념탑. / 출처=김인환, 『한국의 녹색혁명』, 농촌진흥청, 1978, 175쪽

통일벼의 기억

1970년대 한국의 증산 농정을 대표하는 통일벼는 '맛없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쌀'을 표상한다. 빈곤탈출의 상징이자 과학의 승리로 간주되는 통일벼에 얽힌 기억 속에는 다양한 인물들의 영웅서사가 중첩된다.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 IRRI에서 신품종을 만든 농학자 허문회, 통일벼 보급에 앞장선 당시 농촌진흥청장 김인환 등의 농정관료, 근면성실하게 통일벼를 경작해 풍년을 맞이한 '증산왕' 농민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까지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신화의 이면에는 정부의 강압과 그에 따른 농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통일벼를 통한 증산 효과가 입증되자 농정 당국은 후속 품종 개발과 보급에 혈안이 되어 원치 않는 농민들에게까지 신품종 벼를 심을 것을 강요하였다. 강제농정의 결과 1978년 예기치 못한 도열병이 전국적으로 번져 생산량이 급감해버린, 이른바 '노풍파동'을 겪어야 했다. 이 때 한국가톨릭농민회(이하 가농으로 약칭)는 농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정부에 피해보상을 요구하였고, 품종선택권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농민운동을 매개로 하여 통일벼의 역사를 톺아보자.

주곡자급과 농가소득 증대의 기수가 된 통일벼

통일벼는 도농격차 심화와 전 세계적인 녹색혁명 열풍이라는 국내외적 요인 속에서 등장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 초부터 중농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도시화와 공업화를 위시한 경제발전 정책으로 오히려 농촌의 쇠퇴를 야기하였다. 더 줄어든 농촌인구가 더 늘어난 비농업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서, 과학의 힘으로 곡물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녹색혁명은 현실을 타개할 묘수로 다가왔다.

주곡 자급 달성과 농가소득 증대를 표방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된 후 통일벼는 시범재배를 거쳐 1972년부터 전국 농가에 보급되었다. 첫 해의 저조한 실적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과 김인환 청장은 통일벼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고, 다양한 당근과 채찍을 동원하여 통일벼 증산 프로젝트에 돌입하였다. 통일벼 재배 농가에만 각종 지원책을 몰아주었고, 전국적인 하향식 영농교육 체계를 구축하여 국가가 제시하는 영농법을 따르도록 하는 한편, 우수농가에는 다수확상과 상금을 시상하여 의욕을 고취하는 식이었다.

'녹색혁명 성취'와 가톨릭농민회의 저항운동

이런 국가적 노력의 결과 1970년대 중반 국내 쌀 생산량은 점점 증가하였다. 1976년에는 해방 후 지속된 외미 도입을 중단하고 '주곡자급 달성'을 선언하였으며, 1977년에는 사상 최대의 생산치를 기록하여 '녹색혁명 성취'를 공언하였다. 이처럼 통일벼 프로젝트는 총생산량만 본다면 성공 일로를 달리고 있었지만, 농민의 입장에서는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신품종은 농민의 경험지식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농촌지도사들의 세세한 지침을 준수하더라도 농민들은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맞닥뜨려야 했다. 1975년 벼멸구 파동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농정당국은 모든 실패의 원인을 자연재해와 농민의 몰지각함과 나태함 탓으로 돌리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거의 유일한 단체는 가농이었다. 1964년 가톨릭노동청년회 하부조직으로 출발하여 농민 계몽과 농촌 자조 운동에 주력했던 가농은 1974년 지학순 주교 강제 구속 사건 이후 점차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 주체로 성장했다. 우선 농민 당사자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추곡수매가 책정방식을 비판하며 쌀 생산비를 직접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통일벼가 생산량이 많아도 비료와 농약 비용 및 생산량 대비 노동력이 더 많이 들기 때문에 정부가 선전하는 고미가정책은 허구라고 일갈하였다. 또한 함평고구마 피해보상운동을 주도하면서 민주화 운동가들의 반체제운동의 논리와 방식을 수용하였다. 
노풍피해보상촉구 농민대회. / 출처=한국가톨릭농민회, 『가톨릭농민회 50년사 Ⅰ』, 2016, 139쪽

노풍파동과 품종선택권

노풍 벼는 단위 생산량은 물론 맛에서도 우수한 평가를 받은 신품종이었다. 농정당국은 녹색혁명의 성공가도를 지속하기 위해 노풍 벼를 서둘러 전 농가에 보급하였다. 그러나 1978년 여름 전국 논의 약 3%에 해당하는 3만 5천 헥타르 이상의 면적에서 이삭도열병이 발생했고, 특히 노풍 종자에서 집중적으로 속출하였다. 그간 통일계 벼들은 도열병에 대한 저항성이 강하다고 알려졌지만 1976년부터 도열병이 서서히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당국은 총생산량에 지장을 주지 않는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다가 직격탄을 맞은 것이었다.

이에 가농은 농정당국의 실책을 비판하며, 피해농가에 대한 정부의 책임 있는 보상책 마련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피해농가를 방문하고 농민들이 느낀 부조리함들을 응집하여 농민의 품종선택권을 보장하라는 강제농정 철폐운동을 벌였다. 요컨대 품종선택권은 저항의 언어인 동시에 인권의 언어였다. 생산비를 보장받을 수 없는 신품종 벼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생존권을, 직접 생산자인 농민의 인간적 존엄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자유권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 성공신화를 넘어서

농민의 품종선택권은 유신체제에서 신군부로의 교체기에 농민운동에서 잠깐 등장했기 때문에 통일벼는 물론 농민운동사에서도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전두환 정권이 증산 프로젝트를 사실상 포기하고 수입농산물 개방을 지향했기 때문에 1980년대 농민운동의 주요 의제는 강제농정 철폐가 아닌 개방농정 저지에 있었다. 비록 짧은 기간 등장했다 사라졌지만 품종선택권은 기억과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까지도 통일벼는 상반되는 두 가지 맥락에서 재현되고 있다. 유신 정부는 기념탑, 훈장, 배지를 통해 통일벼 신화를 물질화함으로써 성공서사를 공식기억으로 만들었다. 반면 그 이면에 통일벼가 야기했던 강압적 농민동원, 농약과 비료 남용, 농가부채 증대와 같은 사실들은 대항기억으로서 존재한다. 농민과 저항지식인들이 함께 만든 품종선택권이라는 단어는 농민의 대항기억을 매개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품종선택권을 기억한다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복합적인 면을 고찰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끝]

참고문헌

김인환, 『한국의 녹색혁명 – 벼 신품종의 개발과 보급』, 농촌진흥청, 1977 
김태호,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연구소, 2017 
농촌진흥청, 『농정변천사』하, 2008 
한국가톨릭농민회, 『한국가톨릭농민회 30년사』, 1996
Hwang, Ingu, Human Rights and Transnational Democracy in South Kore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22

김성조, 「냉전의 쌀 '통일'과 농업 생산의 공간」, 『역사와 실학』 73, 2020  
박경연, 「1970년대 가톨릭농민회의 농촌현실인식과 성격 - 『농촌청년』을 중심으로」, 『역사와 경계』 121, 2021 
황병주, 「1970년대 유신체제의 안보국가 담론」, 『역사문제연구』27, 2012

민주화운동기념관 오픈아카이브(https://archives.kdemo.or.kr/)

이 글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학술지 '탐라문화'(제78호, 2025. 3.)에 '통일벼 증산농정과 농민의 품종선택권'이라는 제목으로 실은 논문을 '제주의 소리'에 싣기 위해 일부 수정, 요약, 정리한 것이다.

김병수

경북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20세기 한국의 농업사와 환경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