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미더머니〉만 기다려서야 [콘텐츠의 순간들]

엠넷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는 2010년대 대중문화 지형 속에서 매우 이례적인 존재였다. 한국에서 비주류이던 힙합을 빠르게 대중의 가시권 안으로 진입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힙합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쇼미더머니〉는 래퍼들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통로였다. 그 결과 장르 팬들 사이에서만 알려진 래퍼들이 하나둘 TV에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곡이 음원차트 상위권을 장식했다. 고수익을 보장하는 대학교 축제 공연 명단에도 래퍼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쇼미더머니〉 출신 래퍼들은 그야말로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급기야 프로그램이 신(scene)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단일 플랫폼으로서는 굉장한 파급력이었다.
〈쇼미더머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다 보니 걱정도 생겨났다. 프로그램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한국 힙합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물론 당장은 풍요로워 보이는 힙합 신을 보며 환호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시즌 초반에 참여해 스타가 된 이후 더 이상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더라도 활발히 활동하는 래퍼들을 보며 ‘이제는 어느 정도 자생력을 갖추었다’고 판단하는 의견도 다수였다. 그러나 현실은 혹독했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아티스트가 설 무대가 사라졌다. 점점 떨어지던 화제성을 반전시키지 못한 〈쇼미더머니〉가 2022년 시즌 11을 끝으로 후속 시즌을 내놓지 않자, 한국 힙합 시장은 급속도로 위축됐다. 프로그램의 인기가 높던 시기에 유명해진 아티스트 일부를 제외하면 래퍼들은 다시금 방송에서 사라졌다. 투자를 받아 야심차게 출범한 몇몇 유력 레이블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앨범과 싱글은 변함없이 발표되고 신인 역시 꾸준히 등장했지만, 일반 대중에게 노출할 수 있는 창구는 현저히 줄었다. 자연스레 힙합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식어갔다. 장르 팬과 전문가들이 끊임없이 던져온 질문 중 하나, ‘〈쇼미더머니〉 없이도 한국 힙합이 자생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아니다’에 가까워 보였다.
그런 가운데 최근 〈쇼미더머니〉 시즌 12가 제작될 수도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특히 이번에는 엠넷 개국 30주년을 맞아 더 큰 스케일로 제작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아직 100% 제작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쇼미더머니〉가 한국 힙합 침체기를 끝내주었으면 하는 눈치다. 하지만 또다시 침체된 힙합 신을 마주하기 싫다면 지금이라도 방송 프로그램 하나에 매달리는 현실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한다. ‘〈쇼미더머니〉 없이 한국 힙합이 자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핵심은 ‘대중화’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소수가 열광하던 힙합이 인기 가요 순위에 오르고, 우리만 알던 래퍼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다. 비주류 장르가 더 많은 사람의 눈과 귀에 닿게 되면 힙합 신의 질적·양적 성장을 동시에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티스트에게 생계와 명성을 보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현상이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작동할 때에는 문제가 불거진다. 특히 힙합처럼 단순한 장르를 넘어 문화로 탄생하고 발전해온 경우에는 그 본질과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
비주류 문화는 대개 특정한 사회적 맥락과 집단적 정서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종종 고루하거나 부당한 기존 질서를 거스르려는 시도였으며, 주류 담론에서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자본이 개입하고 대중화가 시작되면서 비주류 문화는 무난하고 익숙한 형태로 ‘재구성’된다. 예컨대 〈쇼미더머니〉 속에서의 비속어 가사가 대표적이다. 주류 미디어에 등장한 비속어 가사는 큰 화제를 모았지만 정작 그러한 표현 방식이 담고 있는 사회적·문화적 맥락은 지워졌다. 그저 상대를 헐뜯고 자극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데에만 소비됐다. 결국 껍데기만 남은 채 복제되고 정체성은 희석된 셈이다. ‘억지 대중화’의 폐단이다.
억지 대중화 얻고 철학과 질서 잃다
미디어는 보통 비주류 문화의 신선함을 차용해 상업적 목적에 맞게 조율한다. 이 과정에서 문화는 수단이 되고 아티스트는 기획 대상이 된다. 한국 힙합도 마찬가지였다. 〈쇼미더머니〉는 매번 이 과정에서 힙합과 관련된 크고 작은 왜곡을 저질렀다. 가령 ‘쇼미더머니’란 구절에 관하여 “돈에 한이 맺혔던 미국 래퍼들의 심정이 반영된 말이 관용구처럼 힙합에 정착하게 되었다”라는, 사실무근의 주장을 했다.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는 단어와 디스가 논란이 되자 바로잡으려 노력하기보다 “힙합의 특성”이라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방패막이로 삼은 것은 ‘한국 힙합의 대중화를 위해서’라는 거창한 슬로건이었다.
힙합의 근간을 흔들고 기본적이며 중요한 사실을 곡해하면서까지 대중화에 집착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 아니, 그렇게 억지 대중화를 이루어낸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비주류 문화의 대중화를 위해 그 문화의 본질과 정체성, 그리고 구성원들이 쌓아 올린 역사와 사실이 희생되는 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일부분이라 해도 말이다. 〈쇼미더머니〉의 제작진과 프로그램에 동참한 많은 아티스트는 이 지점을 간과해왔다.
꽤 많은 사람들은 〈쇼미더머니〉가 생소했던 장르에 익숙한 오디션 형식을 도입하여 힙합을 주류로 끌어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11시즌을 거듭하는 동안 힙합과 아티스트 대부분은 마치 일회용품처럼 소비되고 버려지는 느낌이 강했다. 이 같은 현상은 문화와 창작자 모두에게 위기로 작용한다. 한순간 주목받았던 이들은 유행이 지나면 시장에서 퇴출될 위험에 처하고, 자극적이며 반복적인 콘텐츠만 생존 가능해진다. 이는 힙합 신 내부의 건전한 질서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실력이나 철학보다 상품성이나 이미지가 우선되는 구조를 만든다. 또한 묵묵히 자기 작업을 해오던 이들과, 사랑해온 문화의 왜곡을 비판하던 목소리는 소외되고, 귀를 닫고 자기 기만을 두른 채 〈쇼미더머니〉 속으로 투신한 이들만 앞에 선다. 결국 그렇게 만들어진 생태계는 자생력을 잃고 소비와 외면 사이를 오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장기적인 창작 생태계가 구축되지 못한 문화는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다.
힙합의 대중화는 억지로 끌어올려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간을 두고 자라나 안에서부터 힘을 갖추지 않는다면 한국 힙합은 지금처럼 방송 플랫폼 하나에 신의 존폐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힙합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시간과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쇼미더머니〉 제작진이 하지 못한, 아니 하지 않은 일 말이다. 단순한 조명이 아닌 이해와 존중 속에서 진정한 한국 힙합만의 문화가 자라날 수 있다.
강일권 (음악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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