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보다 중요한 거요? 현장의 편안한 공기요” [.txt]
우리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보람도 얻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일 이야기를 ‘월급사실주의’ 동인 소설가들이 만나 듣고 글로 전합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면 보통은 배우의 연기와 줄거리의 개연성, 맛깔스러운 대사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누가 극본을 썼고, 어떤 감독이 연출했는지 검색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촬영감독을 궁금해하는 경우는 드문데, 아마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지극히 적기 때문일 것이다. 프레임 안에 배우와 공간을 담고 나아가 작품의 색과 결을 만드는 사람. 올해로 장편 데뷔 10년 된 촬영감독 이석준씨를 만나 그의 직업 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레디 액션’을 외치면 배우의 극을 찍는 사람이 촬영감독입니다. 저는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로 장편 데뷔했고, 주로 극영화를 촬영했습니다. 오티티(OTT) 시리즈 제작이 크게 늘면서 드라마 시리즈도 촬영하고 있고요.”
마침 인터뷰를 진행한 날은 그가 촬영지 사전 답사를 위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다녀온 이튿날이었다. 드라마의 평균적인 촬영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물었다.
“16부작 기준으로 반년 정도 촬영하죠. 저는 영화 작업을 더 좋아합니다. 여러 작품에 참여하면서 방송국 편성 드라마보다는 영화에 가까운 오티티 시리즈 촬영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영화와 드라마 촬영 작업의 차이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었다.
“영화는 큰 스크린으로 관람하는 거라서 모든 장면을 디테일하고 리얼하게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아무래도 상영 시간 대비 촬영 분량도 적고요. 상대적으로 드라마는 주어진 시간에 비해 촬영할 분량이 많다 보니 효율을 중시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제 업무를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레 영화를 하던 사람들과 주로 작품을 하고 있어요.”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궁금했다.
“작품을 계약하기로 하면 우선 동료들을 모집합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조명감독과 그립 실장, 촬영 팀장을 정하는 거예요. 그립 실장은 카메라의 무빙을 위해 장비를 설치하고 오퍼레이팅(운영)을 해주는 사람이고, 촬영 팀장은 카메라와 렌즈 등 장비 관리, 촬영팀의 인사 관리, 연출이나 조명 등 협력하는 팀들과의 소통을 책임집니다. 보통은 카메라 한대에 네다섯명의 팀원이 필요한데, 에이(A)캠과 비(B)캠 두대의 카메라로 촬영할 때가 많아요. 그러면 비(B)팀의 촬영감독도 구해야 하죠. 빛을 만들고 조절하는 조명감독과 조명팀까지 저와 한 팀처럼 움직여요. 조명팀은 많게는 8~10명, 그립팀이 네다섯명 정도로 구성되고요.”
촬영감독이 인사도 담당하는 줄은 몰랐다고 말하자, 중요한 일 중 하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긴 손발이 잘 맞는 팀을 꾸려야 현장 분위기가 좋아지고 작품도 잘 나올 것이다. 다수가 모여 협동하는 일이기에 그에 관한 고충이 많을 것 같았다.
“저는 공동 작업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고충보다는 즐거움을 더 많이 느껴요. 힘과 지혜를 모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즐겁더라고요. 혼자서만 정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고압적인 태도로 일하는 사람을 싫어해요. 제가 촬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연기거든요. 배우가 최상의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죠. 감독이나 스태프들도 각자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현장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촬영감독의 역할이 꽤 광범위함을 짐작할 수 있는 말이었다.
“촬영감독이라고 저를 소개하면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카메라가 무거워서 힘드시겠어요.’ 그런데 사실 카메라를 항상 들고 찍는 건 아니거든요. 근력이 약해도 장비를 무리 없이 다룰 수 있게끔 현장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어요.”
나 역시 전혀 몰랐던 점이다.
“전공자로서 처음 공부할 때, 뷰파인더에 들어오는 모든 장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배웠어요.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하는 말엔 동의해요. 전체 호흡과 장면의 결과를 책임지기 때문에 감독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훌륭하고 현명한 감독일수록 동료들의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해 조언을 얻으려고 해요. 당장 배우부터 감독이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지 않거든요. 훌륭한 배우일수록 더더욱 그래요. 배우가 감독의 요청대로만 움직여야 한다면 그건 인형극에 가깝죠.”
배우의 자유로운 연기를 옹호하는 그의 말에서 배우에 대한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촬영하는 동안엔 촬영감독이 배우와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이에요. 뷰파인더로 보는 동안 같이 호흡하는 느낌이 들면 무척 즐겁죠. 아무래도 배우와 신뢰가 생기면 제 요청에 우호적으로 응해줄 때가 많아요. 회차가 쌓이면서 차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기거든요. 얼마 전엔 젊은 배우들과 함께 일했는데, 나중엔 저한테 엄마라고 하더라고요. 감독님한테는 아빠라고 하고.”
혹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는지를 묻자,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답했다.
“어느 배우님이 손 편지를 써주신 적이 있어요. 사실 배우가 정말 힘든 직업이거든요. 감독은 감정 표현과 대사 전달, 촬영감독은 정확한 위치와 시선 처리를 요청해요. 연출, 조명, 녹음 등 다른 팀들의 요청도 있고요. 많은 사람들의 요청 사항을 동시에 처리하면서 편집을 위해 앞뒤의 연결도 맞춰야 해요. 그래서 배우는 고되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데, 그런 순간에 제가 힘이 되어줘서 고마웠다고 편지에 썼더라고요. 기뻤어요. 연기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게 전해진 거 같아서요.”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는지 궁금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배우를 통제하지 못하게 해요. 제가 저의 팀 동료들에게 하는 말이 있어요. ‘대선배 배우에게도 요청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해라. 신인이거나 후배 배우라서 편하게 말하는 거면 다시 생각해보고.’ 요청이 많으면 배우에게는 어쩔 수 없이 제약이 생기는 거니까요. 저는 가능한 한 아침마다 배우에게 먼저 다가가서 컨디션이 어떤지 묻고 살피려고 노력해요. 그것도 제 일의 일부거든요. 카메라와 제 주변을 편안하게 느껴야 좋은 연기가 나온다고 믿습니다.”
그 말은 ‘좋은 연기’는 그저 배우만의 역량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사실 우리가 일하면서 맡게 되는 역할과 책임의 일부는 반드시 동료들과 나누어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동료들과 형성되는 관계가 무척 중요할 것이다.
“연출 감독에겐 결정권이 있어요. 어떤 걸 할지, 안 할지 결정할 수 있는 큰 권한이 있죠. 하지만 사안에 따라서 제가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 장소를 정하는 헌팅 때나 스토리보드 작업을 할 때도 카메라가 인물을 어떻게 잡을지를 같이 의논해요. 영화감독이 혼자서 그 모든 걸 다 하지는 못해요. 감독이 동료들에게 믿고 맡긴다는 자세를 보여주면 그때부터 일이 즐겁고 재미있죠. 인물을 어떤 렌즈로 잡을 것인가에 대한 우선권은 저한테 있어요. 광각, 망원, 표준 렌즈가 있는데,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물과의 거리감이 달라지고, 렌즈의 왜곡을 통해 여러가지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람 혹은 사물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는 온전히 저의 영역이자 책임이라는 생각에 존중받으려고 노력해요.”
좋은 작품의 밑바탕엔 ‘동료애’와 ‘존중’이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었다. 서로를 착취하지 않아야 함은 기본적인 태도일 것이다.
“근무 시간이 정해져 있어요. 주당 52시간을 반드시 지켜야 해요. 하루에 14시간 정도 일한다고 보시면 돼요. 주말, 평일 구분은 없지만요. 영화는 대본이 다 완성되어 있는 반면에 드라마 시리즈는 전체 대본 없이 촬영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 경우엔 끝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찍는 거죠. 후반부 대본이 늦게 나올 수도 있는데,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길 때도 있어요. 정해진 근로 시간을 조금 넘겨서 촬영해야 할 때도 스태프들은 작품이 잘 완성되길 바라서 대체로 그에 응하는 편이에요. 사실 이런 경우가 꽤 많아요. 그래도 지금은 주당 52시간 근로가 현장에 제대로 정착한 편이에요. 표준 근로 시간이 정착되기 이전에는 근로 여건이 많이 열악했어요. 저도 들은 얘기인데, 2010년쯤만 하더라도 드라마의 경우는 단체로 사우나에 들어가서 몇시간 쉬었다가 다시 나와서 촬영하곤 했대요. 영화는 드라마보다 주당 52시간 적용이 더 빨랐어요.”
자연스레 조합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시지케이’(CGK)라고 촬영감독조합이 2013년에 생겼어요. 선배 촬영감독이 과로로 쓰러져서 수술까지 받았는데 산재 처리를 못 받은 일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동료들이 권익을 지키고자 조합을 만든 거예요. 그 외에도 영화노조와 감독조합이 있고, 부당한 행위를 당하면 신고할 수 있는 영화인 신문고도 있어요. 다방면에서 각각의 노력으로 차츰 인식이 바뀌었죠. 성평등을 위해 촬영 전에 전 스태프들이 성교육도 받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많이 있었고요. 얼마 안 가서 방송 쪽도 비슷한 단체들이 생긴 것으로 알고 있어요.”
현장에서 겪었던 부당한 일들이 연대와 인식 변화로 사라지고 있는 추세 같았다. 물론 해결되어야 할 과제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힘든 점은 없는지를 물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게 가장 힘들죠. 작품을 언제 하게 될지를 계약하기 전까지는 모르니까. 프리랜서로서 언제 일을 시작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태를 견뎌야 해요.”
불안을 견뎌야 하는 직업이더라도 그는 현장으로 돌아가면 그걸 잊을 만큼의 즐거움을 느끼는 듯했다. 끝으로 촬영감독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 무언지를 물었다.
“앵글 잡고 색을 정하고 이런 게 중요하긴 하지만 결국은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해요. 동료들과 협업해야 하기에 서로 묻고 결정하는 일이 대부분이라서, 생각을 언어화해 상대에게 효과적으로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죠. 그리고 오직 자기 생각만이 정답이라는 태도는 작품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그 말은 결국 사람이 일의 중심에 있다는 의미 같았다. 사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그는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꺼냈다. 서로의 능력을 믿고 존중해주는 일의 중요성도 자주 언급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걸 알려주자, 이런 말이 돌아왔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물음은 우리가 잊고 있던 중요한 것을 떠올리게 했다.
이서수 작가
이서수 l ‘월급사실주의’ 동인.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 ‘엄마를 절에 버리러’ ‘몸과 고백들’, 장편소설 ‘헬프 미 시스터’ 등을 썼다. 젊은작가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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