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기우사(祈雨辭)- 비야 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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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이지만 비는 제대로 오지 않고 무덥기만 하다.
창가에 서서 애써 지난 비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얼마 전인가, 장마에 걸맞은 비가 오던 풋풋한 풍경을 상기하며, 문득 물의 정체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비는 땅에 내려앉아 물이 되고 강이 돼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마침내 바다에 이르러 세상을 감싸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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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이지만 비는 제대로 오지 않고 무덥기만 하다. '마른장마'라 할지 모르지만, 이건 옳은 장마가 아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넉넉한 빗줄기를 고대한다. 장마가 장마로서 제 자리를 찾고 정상으로 돌아오길 바랄 따름이다. 창가에 서서 애써 지난 비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얼마 전인가, 장마에 걸맞은 비가 오던 풋풋한 풍경을 상기하며, 문득 물의 정체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빗물이 중력을 이기지 못해 몸을 아래로 던지면, 나뭇잎은 물방울의 두드림에 뜨거운 머리를 식히듯 잠시 고개를 숙였고, 아스팔트 검은 길은 곧 물의 발자국에 얼룩져 갔으며, 웅덩이에 잠긴 하늘은 찌푸린 잿빛 구름을 보듬었다. 메마른 마음도 빗물에 젖어 드는 듯 착 가라앉았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아무 생각도 없는 듯 떨어지는 빗방울, 그 속에는 자연의 순리와 세월의 때가 묻어있었고 어쩌면 누군가의 염원이 녹아 있을는지도 몰랐다.
비는 땅에 내려앉아 물이 되고 강이 돼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마침내 바다에 이르러 세상을 감싸 안는다. 그리고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고, 또다시 고향이 그리운 양 비가 돼 대지로 돌아오곤 한다. 그 끝없는 순환을 상상하면 인간사 희로애락마저 그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듯하다. 세상천지 만물에 스며드는 그 무심한 물이 얼마나 속이 깊고 진실한 존재인지 빗물을 바라보면서 새삼스레 다시 깨닫는다.
빗물을 마주 대하노라면 인생도 그처럼 무한궤도를 타고 순환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기론이든지 윤회설이든지 다 물에서 추론된 가설이지 않을까.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그 말의 참뜻을 다시 곱씹어 본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노자는 과연 물의 어떤 물성을 높이 평가한 것일까. 물은 다투지 않으며,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스스로 나아간다. 산이 가로막히면 기꺼이 계곡을 따라 돌아갈 뿐 불평불만이 전혀 없다. 그 겸손과 양보는 천박한 비겁함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보듬고 포용하는 고귀함이다.
우리의 지난 삶은 과연 어떠했던가. 이웃의 고뇌와 아픔을 사려 깊게 받아들이고 따뜻하게 손잡아 준 적이 있었는지, 누군가의 가슴에 맺힌 하소연을 진정성 있게 귀 기울여 본 적은 있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바위와 같은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갈 줄 알았던가, 아니면 그 앞에서 멈춰서서 스스로 상처 입고 좌절하진 않았던가. 네모나고 각진 그릇 혹은 동그란 병에 담겼을 때, 그 모양을 받아들이고 또 순응했었던가. 행여나 예쁜 모양만 고집하며 허공을 향해 종주먹을 쥐지 않았던가. 비록 이러쿵저러쿵 말은 없으나 물은 저만치 떨어져 그냥 웃을 뿐이다.
시원한 빗소리가 몹시 그립다. 정신이 혼미한 감잎이 손바닥을 잔뜩 펴들고 반가운 손님을 기다린다. 누군가의 목마른 입술을 적셔주는 한 방울 물방울이 되길 바란다면 지금쯤 찾아와줘야 하지 않을까. 기다림에 지쳐서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기 전에 말이다. 여전히 상선으로 남아서 생명을 사랑하는 귀한 존재로 남아있으려고 한다면, 실의에 빠진 그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위안이나마 줄 수 있는 착한 존재이길 진정 바란다면, 이젠 그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줄 때가 됐다.
무더운 여름날, 어쩌면 뻔하고 고루할 수도 있지만, 물의 정체성과 그 소중한 가르침을 거듭 곱씹어 본다. 물은 그 어떤 틀에라도 담기되 그 본질은 잊지 않고 그 누구와도 어울려 지내되 그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또 있어야 할 곳이라면 반드시 찾아가는 정직한 존재다. 비가 꼬리를 감춘 지 한참이나 지났다. 진정 이 세상을 떠받치는 존재라면 지금쯤 하늘에서 내려와야 할 때다. 하다못해 소나기라도 푸짐하게 와줬으면 좋으련만. 대지가 흠뻑 젖도록 비야 내려라.
오철환 전 대구시의원 / 소설가, 현진건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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