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으로 세운 또 다른 세상: 조각가 엄태정

문소영 2025. 7. 5.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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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엄태정 개인전 ‘세계는 세계화한다’ 전경. [사진 아라리오 갤러리]
“아마 최근 뉴스에 가장 많이 나온 작품이 내 조각일 겁니다.”

87세 원로 조각가 엄태정은 지난달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개인전을 시작하면서 만난 기자들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사건들 때문에 대법원이 많이 등장하잖아요. 대법원 중정에 있는 큰 조각이 내가 1995년에 제작한 ‘법과 정의의 상’입니다.” 그의 말대로 ‘대법원’을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 대부분에서 흰 건물을 배경으로 우뚝 선 검은 대칭형 추상 조각을 발견하게 된다. 저울과 칼이 원의 조화 속에 결합된 형태의 청동상이다. 작가는 “법원의 영혼을 담은 신성당이 되도록 세웠습니다. 한 장소에 조각을 놓는 것은 그 장소에 하나의 세계를 건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모습. 정면에 엄태정 작가의 청동 조각 '법과 정의의 상'이 보인다. [사진 뉴시스]
그의 이러한 작품 철학은 8월 2일까지 열리는 이번 개인전의 전시작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시의 제목은 ‘세계는 세계화한다’로 작가에게 많은 영감을 준 20세기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에서 따왔다. “세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간과 사물, 시간과 장소가 맺는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드러나고 구성되는 ‘살아 있는 장’으로 이해한다는 뜻”이라고 아라리오 갤러리는 설명한다. 3차원 조각은 2차원 회화나 영상과 달리 관람자가 그 물질적 존재의 둘레를 돌며 시시각각 다른 이미지를 발견하는 특성이 있기에 이처럼 ‘관계’와 ‘시공간’이 중요한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전시에는 엄태정 작가의 1970년대부터 제작된 작품 중 지금까지 많이 전시되지 않았던 것들과 신작 조각, 회화, 드로잉 등 27점이 나와 있다. 전시를 보면 그가 일관되게 추상 금속 조각을 추구해온 한편, 다양한 금속의 물성을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엄 작가는 60여 년간 다양한 추상 금속 조각을 실험해 왔다. [사진 아라리오 갤러리]
먼저 1층 전시장에 있는 신작 ‘낯선자의 은신처-티탄의 은빛 베일-철인은 하늘을 걷는다’와 ‘은빛 베일-출현’ 시리즈는 알루미늄 조각이다. 얼핏 보면 이들은 무언가를 담은 거대한 알루미늄 용기 같으며 그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형태다. 하지만 그 안은 결코 알 수 없으며, 그 “베일” 같고 “덮개” 같은 은빛 외부가 오히려 본질이라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폭로는 아름다움에서 마법, 수수께끼를 제거하고 아름다움을 파괴합니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폭로되지 않고 밀교처럼 알 수 없어야 신비로움의 면모를 지닙니다”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그는 이것이 “탈마법화에 저항하는 예술”이며 또한 “은빛 광채를 발하는 알루미늄의 물성이 아우라를 창출한다”고 덧붙였다.
조각가 엄태정 개인전 ‘세계는 세계화한다’ 전경. [사진 아라리오 갤러리]
지하 전시장에 있는 ‘객정(客情)’ 시리즈는 붉은 구리로 이루어져 있다. ‘객정-춤’ ‘객정-방랑자’ 등은 상자 형태의 유닛이 휘어져 흐르거나 서로 충돌하며 결합된 상태로서 “경계를 넘나드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의 확장된 형태가 ‘1000개의 찬란한-막고굴 시대’ 연작이다. 이 작업은 중국 둔황의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리는 동굴 사원 막고굴과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석굴, 한국의 인공 동굴 사원 석굴암 등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 또한 그가 “하나의 세계”이자 “신성당”으로서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축은 평면 작업이다. ‘만다라-하늘-무한주’와 ‘만다라-법열-무한주’는 엄 작가가 “나의 아버지”라 칭하는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1876~1957)의 ‘무한주’ 모티프를 품고 있다. 또한 반복을 통해 화면의 경계를 넘어서는 확장성과 무한한 느낌, 거기에서 오는 숭고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

조각가 엄태정 개인전 ‘세계는 세계화한다’ 전경. [사진 아라리오 갤러리]
엄 작가는 1960년대 서울대 재학 시절 철의 물성에 매료되어 금속 조각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쇠의 물성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초기에는 동양적 자연관에 기반한 추상 조각을 주로 선보였다. 1970년대 중반에는 철에서 구리로 재료를 전환하면서, 구리의 부드러운 물성을 활용해 매끄러운 외면과 거친 내부의 대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조각 내부에 흐르는 에너지를 시각화 했다. 1990년대에는 조각의 공간성을 보다 심화시켰고, 2000년대 이후에는 조용하고 시적인 미학을 추구하며 알루미늄을 주요 재료로 삼았다. 이러한 변화들을 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한 원로 조각가의 회고전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형으로 진화하는 조각의 서사이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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