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황주리, 대타로 '문학사상' 글 썼더니…이어령 "문학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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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친구들
“나는 이 나이에도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가 모르고 있는 내 안의 가능성, 내게는 사실 소설 쓰기가 그러하다. 에세이를 오래 써왔지만 소설을 쓰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날 내가 그린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내 그림이 다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표현 매체가 다를 뿐 내가 하나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황주리는 지금까지 4권의 소설과 6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그림과 글이 모두 뛰어난 화가이자 소설가다.
황주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광화문에서 자랐다. 수송국민학교에 입학하여 1년을 다닌 후 경복국민학교로 전학했다. 그의 부친 황준성(1923~1989)은 해방 직후 서울 충무로에서 악보출판사를 경영했다. 작곡가 김순남(1917~1983)은 노래를 잘 부르는 황준성을 좋아했다. 자신이 만든 노래를 황준성이 부르게 하겠다 했다. 나중에 방송인이 된 어린 딸 김세원을 두고 월북할 때도 황준성을 데려가고 싶다 했다.

마해송은 신태양에서 ‘식도락 근처’란 수필을 연재했다. 수필들을 모아 ‘요설록’이란 책으로 펴냈다. 1950년대, 빈곤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식도락의 세계가 책 속에서 펼쳐졌다. ‘식도락 근처’가 신태양에 연재되던 1957년에 황주리가 태어났다. 황준성이 딸 이름을 마해송에게 부탁하니 주혜, 주리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왔다. 주혜라 하면 시집을 잘 갈 것이고 주리라 하면 이름을 날릴 것이라 했다. 주리를 택했다. 요설록의 장정을 맡은 화가 이준(1919~2021)은 나중에 이화여대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문학과 미술에 안겨서 자란 황주리였다.
어린 황주리는 도통 말이 없었다. 엄마하고 대화를 나눌 때만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다섯 살이 된 딸을 미술학원으로 데려갔다. 황주리의 집은 내수동 181번지, 집 근처 가축병원 2층이 미술학원이었다. 미술학원의 또래 아이들하고도 말을 섞지 않았다. 급기야 학원에 가는 것도 싫어했다. 할 수 없이 일주일에 한 번 학원선생이 황주리의 집으로 와서 독선생을 맡았다. 나중에는 그림에 재미를 붙였다. 나무 케이스에 든 스위스제 크레파스의 냄새가 좋았다. 종이 케이스에 든 일제 사쿠라 물감의 감각이 고급스러웠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즐거워지자 그림에만 몰입했다.
수송국민학교, 경복국민학교를 다니면서 미술대회를 휩쓸었다. 조례시간만 되면 으레 교장선생님이 대신 주는 미술상 상장을 받으러 단상으로 나아갔다. 덕성여중을 거쳐 숙명여고에 진학했다. 덕성여중에는 화가 하인두의 부인 류민자가 미술교사였다. 숙명여고에 가니 미술교사로 평양미술대학대학을 다니다 월남하여 홍익대를 졸업한 황용엽이 있었다.
![황주리의 작품 ‘식물학’. 캔버스에 아크릴릭, 194x260㎝. [사진 황주리]](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7/08/joongangsunday/20250708075241980mpyd.jpg)
황주리의 집에는 책이 많고 원고지는 가득 쌓여 있었다. 황주리는 원고지에 그림을 그려보았다. 1981년의 일이다. 원고지 작품 시리즈가 한동안 황주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원고지에 글을 쓰고 끊임없이 낙서를 했다. 낙서가 그림이 되었다. 그 그림이 나중에 원고지로 돌아가서 소설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대학원생 때다. 문학사상의 어느 필자가 펑크를 내었다. 대타로 글을 썼다. 그 글을 보고 감동한 이어령은 미술보다 문학을 택할 것을 권유했다.
1987년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는 장미셀 바스키아(1960~1988), 키스 해링(1958~1990) 등이 주도하던 뉴페인팅의 시대가 이미 저물고 있었다. 미술관의 전시장마다 쓰레기를 쏟아부은 듯한 설치미술이 유행이었다. 딸과 함께 뉴욕을 간 황준성은 새롭고 난해한 설치미술이 못마땅했다. 황주리에게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황주리는 뉴욕이 좋았다. 뉴욕은 세계의 작가들이 다 모여 경쟁을 하는, 터가 센 곳이다. 세계미술의 중심 뉴욕에서 작가로서의 살아남겠다는 결기가 섰다.
뉴욕대(NYU)에서 세라믹 조각을 전공했다. 황주리는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스타작가가 되어 있었다. 뉴욕 시절에는 서울의 진화랑 소속 작가였다. 황주리는 뉴욕에 와서 처음 해 보는 세라믹 조각 작업이 재미있었다. 가나화랑의 이호재 대표가 뉴욕으로 와서 세라믹 조각 전시를 제안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작품이 귀하고 아까웠다. 지금 그 작품들은 한국에 와 있다. 아직 공개된 적이 없다. 언젠가는 전시를 해야만 하는 작품들이다.
![1996년 황주리 개인전에서 만난 고 이어령 선생(왼쪽)과 황주리 작가. [사진 황주리]](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7/08/joongangsunday/20250708075242310vvgk.jpg)
환갑이 지나서 자신이 살았던 세계무역센터 근처를 찾았다. 예전에도 기가 센 곳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여전히 강한 기가 느껴졌다. 엄청난 사건을 겪은 그 땅은 이미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끔찍한 사건의 악몽도 자본주의를 이기지는 못했다.
10년 이상의 뉴욕 생활을 마치고 황주리는 서울에 정착했다. 한강변 동부이촌동의 아파트, 같은 층의 두 채가 마주 보고 있다. 한 채는 어머니가 사시고 한 채는 황주리의 작업실 겸 거처다. 황주리는 현관문만 열면 닿는 두 집을 오가며 생활한다.
황주리는 산책을 좋아한다. 해가 질 무렵 동대문시장으로 가서 옷 구경을 한다. 그녀의 그림에 동원되는 색상처럼 원색의 화려한 옷을 좋아한다. 미국에 살 때, 흑인들이 황주리의 원색 옷차림을 보면 너무 좋아했다. 택시를 타면 흑인 기사가 도통 내려줄 생각을 안 했다.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짓말로 내릴 수가 있었다.
단추 같은 작고 이쁜 물건을 좋아한다. 영화광이어서 극장을 자주 찾는다. 그녀는 운전을 안 하고 또 결혼을 안 했다. 그러니 누구보다 자유롭다. “나는 내 그림들이 봄날의 밝은 즐거움을 담고 있었으면 한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마티스). 지적이면서 감성적이었고, 노력하면서 변화했고, 필경 자유로웠던 마티스를 닮고 싶은 황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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