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은 '15번 양반' 18년 최장기 복역한 독립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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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19〉 쌍공 정이형
정이형(鄭伊衡) 선생은 1897년 평북 의주의 대지주 정효기의 2남으로 태어났다. 원 이름은 원흠(元欽), 호는 쌍공(雙空)으로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의미다. 어려서 외가 어른 김평식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김평식은 후일 만주로 망명해 대한독립단과 의군부 등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한 독립 운동가다. 이복 형 정원익도 서북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경술국치 후에는 독립군에 군 자금을 제공하는 등으로 수차례 일경에 체포됐던 인물로 선생은 일찍부터 항일 민족 의식이 충만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정이형 선생은 오랜 기간 수형 생활을 하면서도 몸가짐이 흐트러짐이 없어 ‘15번 양반’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사진 독립기념관]](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8/18/joongangsunday/20250818154628262vvsc.jpg)
1922년 일경의 고문 후유증으로 형이 사망하자 의주로 돌아온 선생은 본격적인 독립 운동에 나설 결심으로 신의주에서 살얼음이 언 압록강을 건너 요녕성 관전현으로 망명한다. 25세의 선생은 그곳에서 서간도 독립군 조직인 ‘대한통의부’에서 교통부장을 맡고 있는 오동진과 총사령관 김창환을 만나면서 항일 투쟁 선봉에 나서는 계기를 맞는다. 대한통의부에서 활동하던 선생은 대한통의부 조직이 군사 중심 체제로 개편되면서 군사 활동에 나서 의용군 소대장 등으로 만주의 친일 단체 공격, 친일파 숙청, 국내 진공 작전 등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이 무렵 만주 지역에서는 독립 운동을 내건 민폐 사례가 빈번했고 독립운동단체들도 여러 파벌로 사분오열 되어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게 된 선생은 독립 운동 단체의 통합이 시급하고 이념이 중심이 되는 항일 운동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1923년 1월 임정 정비와 독립 운동 기관의 통합을 위해 상해에서 국민대표회가 개최됐지만 임정 개편에 대한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대립 등으로 무산된다. 서간도 지역에서는 대한통의부에서 의군부, 참의부가 분리돼 나갔으나 1924년 대한통의부를 근간으로 길림주민회·서로군정서·광성단·의성단 등 10여 개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을 이루어 군 정부 형태의 ‘정의부’를 탄생 시키게 된다. 정의부는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 두고 한인 동포들을 통치하면서 무장 투쟁을 전개했고 선생은 군사부에서 의용군 소대장, 중대장 등을 맡으며 길림성과 압록강 인근 평안도 지역 등에서 일제 경찰관서 습격, 군 자금 모집, 독립 선전 공작, 부역배 암살 등 다양한 대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26년 고려혁명당을 창당해 항일 운동을 하던 선생은 이듬해 체포된다. 사진은 체포 당시 기록. [사진 국사편찬위원회]](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8/18/joongangsunday/20250818154629643dyix.jpg)
선생은 망명 초기부터 독립 운동 단체의 통합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독립 운동이 위축될 상황이 전개되자 독립 운동의 새로운 이념과 방략을 모색한다. 계급 혁명보다는 진보적 민족주의를 내세워 중도우파적인 입장에 있던 선생은 양기탁, 오동진 등과 함께 독립 운동을 위한 새로운 이념과 지도 단체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은다. 1926년 만주 지역 민족 지도자들이 양기탁의 집에서 연석 회의를 개최했고 선생은 정의부 대표로 참가했다. 이 회의 결과 만주의 정의부 인사,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 등 국내 천도교 지도자,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국내에서 설립된 ‘형평사’ 인사, 연해주 독립 운동가 등과 함께 그 해 4월 길림성에서 ‘고려혁명당’을 창당하게 된다. 양기탁이 위원장을 맡고 선생은 주도적으로 당을 이끌어 나갔다. 고려혁명당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동학이 함께하여 “자유 평등의 이성적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설정하고 항일 혁명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고려혁명당 선언. [사진 독립기념관]](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8/18/joongangsunday/20250818154631085bxcb.jpg)
선생은 광복 후 출옥해 좌우 합작으로 ‘8·15출옥혁명동지회’를 조직했으나 신탁 통치를 둘러싼 대립으로 해체됐다. 임정 지지 하에 국군 건설을 준비하기 위해 대한국군준비위원회가 설치되자 총사령부 부관부장으로 참여했고 이어 광복군 국내 지대의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선임되어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奸商輩)에 대한 특별법률 조례’ 기초 위원장으로 입법을 주도했으나 미군정의 인준을 받지 못해 시행되지 못했고 1948년 정부수립 후 이를 토대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다.
이회영과 사돈, 1963년 건국훈장 추서
선생은 좌우합작위원회, 민주주의독립전선준비위원회, 민족자주연맹 등에 중간파로서 참여하는 등 남북통합정부수립을 위해 진력했고 평양의 남북협상에도 참석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50년 5·30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서울 마포 을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6·25 당시 서울에서 어렵게 살다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했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으나 심장병으로 1956년 59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선생은 무장 독립 투쟁과 독립 운동 단체 통합 운동에 몸을 바쳤고 오랜 기간 수형 생활을 했으나 국제 정세에 밝았고 고고한 인품을 잃지 않았으며 만주의 항일 투쟁 시절부터 좌우합작을 주장했던 중도파 민족주의자였다. 해방 후에는 극좌·극우의 테러를 반대하고 민족통합을 주창했으며 민주주의와 토지개혁 등 개혁 정치를 지지하고 친일파 척결에 진력 하는 등 민족 통일 국가 건설을 위해 매진했다. 빈곤한 노후를 보내다 일생을 마친 선생의 사후 1963년 정부는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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