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와 ‘고구마’의 반복, 다른 민주주의를 상상할 때 [.txt]
‘죽음’이라는 극적 사건을 통해서만 결집하는 ‘민’
‘세속적이고 미지근한’ 일상의 민주주의 이뤄야

“국민들이 드라마 볼 시간에 대통령이 계엄 선포 방송을 한 건 국회의원들이 다 들어가서 계엄 해제하라고 통보한 것”이라는 게 올해 초 탄핵 심판에서 윤석열 쪽이 밝힌 입장이었다. 하지만 정작 계엄이 선포된 지난해 12월3일 밤 10시27분경 지상파와 종편 등에서 방영되고 있던 드라마는 한편도 없었다. 이날 밤 국민들이 본 드라마는 방송국이 제작한 것이 아니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제작한 드라마였다.
이런 정문일침으로 시작하는 ‘몸, 스펙터클, 민주주의’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드라마’라는 키워드로 분석한다. 한국 현대 정치사가 암살, 납치, 정략, 의리, 배신, 고난, 승리, 좌절, 복수 등 풍부한 드라마적 요소로 가득 차 있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방식과 방향으로 사태가 급변하거나 돌발적인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계엄사태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국내외 언론들은 ‘케이-드라마를 뛰어넘는 극적 현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책은 한국 민주주의가 ‘열망-절망의 사이클’이라는 드라마의 레퍼토리를 반복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는 민주화와 탈민주화의 교차이기도 하고, 축제와 탈진의 왕복, 사이다와 고구마의 반복이기도 하다. 한국은 1987년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지만, 그 결과는 군인 출신 대통령 당선이라는 충격이었다. 전례 없이 높은 지지율로 기대를 모았던 문민정부는 공안몰이에 의존하며 각종 사건·사고에다 무능만 드러내며 임기를 마쳤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과감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 많은 희생을 낳고 보수 정권의 재집권을 초래했다. 역사상 첫 대통령 탄핵과 촛불집회를 등에 업고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자신이 발탁한 검찰총장을 보수의 대선후보로 당선시켰으며 이는 내란 사태로 이어졌다. 이렇게 우리의 민주주의는 기대가 실망으로, 열정이 냉소로, 자부심이 배신감으로, 전진이 후퇴로 바뀌는 레퍼토리를 무한 반복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죽음’과 ‘결집’이라는 두개의 스펙터클을 양축으로 진행되는 서사다. 김주열의 죽음은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을 열어젖혔으며, 박종철·이한열의 죽음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세월호의 침몰은 대규모 촛불집회와 박근혜 탄핵으로 마무리됐다.
한 사람에게 죽음은 생의 종결이지만, 한국 민주주의에서 죽음은 서사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죽음은 죽은 자에게는 사건이 아니다. 그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만 혹독하게 생생한 사건이 된다”는 말처럼, 죽음의 스펙터클을 목격한 ‘민’은 이전과는 다른 주체로 거듭나는 변형 및 재구성의 과정을 시작한다. 책은 ‘시민’ ‘국민’ ‘민중’ ‘인민’ 등으로 다양하게 불릴 수 있는 정치적 주체를 ‘민’이라고 호명한다.

저자는 한국 민주주의 드라마의 구조를 3단계로 도식화한다. 첫번째 단계에서 민은 폭력의 대상으로 전락하거나 주검이 되어버린 자연적 신체의 이미지로서 무대 또는 스크린에 등장한다. 두번째 국면에서 민은 객석에서 이러한 참상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뒤 각성과 회심을 거쳐 운동에 나서는 주체가 된다. 마지막 단계에서 민은 무대로 올라가 집합적 신체를 이루며 결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죽음과 결집’이라는 한국 민주주의의 강렬한 드라마와 극적인 구조가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와 취약성이라고 책은 주장한다. 민은 사적 영역에서 각자도생하다가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에야 등장해 민주주의를 소생시킨 뒤 사라지기를 반복해 왔는데, 이는 죽음이나 민주주의 붕괴 같은 극적인 사건이 없으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죽음으로 이뤄내는 성스럽고 뜨거운 민주주의가 아니라 일상적이고 세속적이며 미지근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신진 사회학자인 저자의 마지막 문단에서 희미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다.
지난해 말 여의도에서 열린 탄핵 촉구 집회에서 한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 탄핵을 외치면서 여성혐오도 하지 말자는 주장을 덧붙였다. 그러자 일부 남성들 사이에서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대통령이 아니라) 저 여자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이때 집회에 참여하고 있던 저자는 ‘어렵게 모인 이 사람들이 갈라지면 어쩌나’ 하는 조마조마함이 올라왔단다. 그는 자신이 느낀 불안감을 반성하며 이렇게 책을 마무리한다. “나는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무대에서 끌어내림으로써가 아니라 누구라도 무대에 오를 수 있게 함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다시 배우고 몸에 익히고자 한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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