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토리] '느리게 달리는 법' 권은주 전 마라톤 감독이 전하는 'K-러닝' 철학
(서울=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천천히 달리는 게 오히려 어렵습니다. 빨리 뛰는 건 쉽죠. 마음이 앞서니까요. 하지만 달리기를 오래 즐기고 싶다면, 먼저 속도를 내려놓는 훈련부터 시작해야 해요."
1997년 춘천마라톤에서 한국 여자 마라톤 신기록(2시간 26분 12초)을 세운 권은주 전 마라톤 국가대표 감독의 말이다. 21년간 자신의 기록을 유지하며 한국 마라톤 역사에 이름을 새겼고, 한때는 100m를 20초대로 달리며, 세계 무대를 바라봤던 그가 이제 아마추어 러너를 만날 때마다 "기록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느리게 달리는 법'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됐다. 그만의 새로운 'K-러닝' 철학이다.
이제는 아마추어 러닝 클럽 '런 위드 주디'(Run with Judy)를 운영하고 있다. 수많은 러너와 걷고, 뛰고, 때로는 멈추는 연습을 함께 하며 새로운 'K-러닝'의 철학을 전하고 있다.
제작진은 최근 서울 광진구의 러너 카페에서 열린 그의 저서 '인생에 달리기가 필요한 시간' 북토크 콘서트 현장에서 권 감독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권 감독은 가수 션의 마라톤 트레이너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기록을 좇았던 엘리트 선수 시절을 보낸 그가, 이제는 러너에게 '천천히', '꾸준히', '내 페이스대로' 달리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이 내 인생에서 제일 좋은 달리기 시기다. 달리는 목적이 바뀌었다. 이젠 누굴 이기려고 뛰는 게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나를 단단히 하는 시간으로 달리고 있다."(권은주 감독)
권 감독과 함께 달리기를 시작한 멤버들은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이를 통해 삶을 회복했다는 점은 모두 같다고 전했다. 누군가는 육아에 지쳐서, 누군가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달렸다. 어떤 멤버는 우울감에서 벗어나려고 시작했는데, 지금은 아예 러닝 코치가 됐다. 달리기가 일상을 바꾼 것이다.
◇ 개그맨 꿈꾸던 소녀, 달리기 재능을 발견하다
1977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권 감독의 꿈은 처음엔 '개그맨'이었다. 사람을 웃기고, 칭찬받는 걸 좋아하던 소녀는 어느 날 뜀박질에서 '재능'을 발견한다. 수영도, 양궁도 어려웠던 시골 마을에서 운동회만 열리면 가장 주목받는 건 빨리 달리는 아이였고, 그 주인공이 바로 권은주였다.
"4학년 때 5~6학년 언니들을 다 이기고 경북 대표로 뽑혔다. 그게 나를 육상의 세계로 끌어들였다."(권은주 감독)
하지만 첫 전국대회에서 그는 인생의 첫 패배를 경험한다. 600m 달리기에서 3등을 했다. 경기 후 운동장에 주저앉아 울 정도로 충격이었단다. 다시금 승부욕을 불살랐다.
문경호계중학교와 경북체육고를 거쳐 18세에 코오롱 육상팀에 입단했고, 20살이 되던 해 그는 한국 장거리 육상계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단거리보다 지구력에서 강점을 보인 그는 곧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다음은 뜻밖의 시련이 이어졌다.
보스턴 마라톤에서 초청장이 왔을 때, 권은주 감독은 또 한 번 자신의 기록을 깨고 싶었다. 하지만 훈련 도중 발에 이상을 느꼈고, 그는 아픔을 외면했다.
"(그때 당시)지금 아프다고 멈추면 경쟁에서 밀린다고 생각했다. 결국 발바닥에 염증이 생기고 수술까지 했다. 마라톤은 물론, 일상생활조차 힘든 상태가 됐다."
1998년에는 반대 발도 같은 증세로 수술했다. 선수 생명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활을 거듭하며 2002년 춘천마라톤에 복귀했고, 다시 우승했다.
"기록보다, 제가 다시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고마웠다. 가장 행복했던 완주였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왜 이 운동을 하고 있었는지."
◇ 러닝의 가치는 경쟁이 아닌 회복
그는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초등학교 코치를 맡았지만, 금세 한계를 느꼈다. 성적 지상주의, 단기 성과 중심의 육성 시스템과 맞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식스 러닝클럽의 코치 제안을 받았다. 아마추어 러너와의 첫 만남이었다.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열심히 뛰지? 그런데 하루이틀 지나며 그 열정이 전염됐다. '달리기가 이 사람들 삶을 바꾸고 있구나'를 깨달았다."
권 감독은 아마추어 러너들이 체력 향상만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위해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도자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잘 뛰게 하는 법'보다 '즐겁게 오래 달리는 법'을 알려주고 싶다. 많은 사람이 달리기를 싫어하지 않도록 돕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도 러너에게 '페이스를 내려놓는 용기'를 강조한다. 숫자와 비교는 달리기를 망치는 첫걸음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사람마다 근력도, 컨디션도, 회복 속도도 다르다. '왜 나만 느리지?' '쟤는 나보다 빠른데?' 이런 비교는 다 쓸데없다. 어제의 나와 비교하는 게 전부다."
달리기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그는 "일단 걷기부터 하라"고 말한다. 운동화만 신으면 된다고, 오늘 저녁 한 번쯤 나가보라고 조언한다.
"달리기 잘하는 건 두 번째다. 나가서 100m라도 뛰고, 숨이 차면 걷고, 그다음에 다시 뛰면 된다. 그게 계속 반복되면 몸이 기억하게 된다. 어느새 건강해지고, 표정도 밝아진다."
권 감독이 만난 러너 중에는 출산 후 잃어버린 자존감을 회복한 엄마도, 마라톤을 통해 서먹했던 아버지와 가까워진 아들도 있었다. 우울증을 극복한 사람도 많았다.
"달리기는 사람을 바꾼다. 내가 바뀌면, 주변도 바뀐다. 그러니까 달리기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금 당장 나가보라고 말한다. 답답한 날, 한 발 내딛는 것. 그게 시작이다."
많은 러너가 잘 알고 있지만 극복하기 힘든 '서브3'라는 단어가 있다. 풀코스 마라톤을 3시간 안에 완주하는 것을 말한다. 1km당 4분 16초 안에 달려야 가능한 이 기록을 위해 수많은 러너가 페이스를 계산하고, 훈련을 반복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권 감독이 말하는 '천천히 달리라'는 원칙은 새롭게 다가온다.
제작진은 권은주 감독의 북토크 콘서트 현장의 이모저모와 그만의 'K-러닝' 철학을 영상으로 담아봤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프로듀서 : 신성헌, 영상 : 박주하 PD(lemon9@yna.co.kr), 촬영협조 : 저스트런잇)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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