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고용노동부 장관, 부총리 격상은 어떨까
AI 기술혁신·산업 재편 등도 고용노동과 밀접
여러 부처와 수평적 협력·전략적 조정 중요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사상 최악의 경제 환란으로 평가받는 ‘1997년 외환위기’는 그해 1월 재계 순위 14위 한보그룹 부도로 촉발됐다. 정·관계 전방위 로비로 6조 원에 육박하는 불법 대출을 받아 성장한 한보의 몰락으로 금융권은 직격탄을 맞았다.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 은행장들이 뇌물 수수 혐의로 줄줄이 구속됐지만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은 국회의 한보비리 청문회에 출석해 추가 대출만 이뤄졌다면 부도는 없었다고 마지막까지 큰소리쳤다. ‘3,000억 원을 추가 투입해도 두 달밖에 못 버텼을 것’이라는 한보 관계자 진술에 “자금 흐름은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이 어떻게 압니까”라고 호통쳤다. 자신은 주인, 직원은 머슴이라는 그의 적나라한 인식에 적잖은 국민이 분노했다.
예고 없이 닥친 외환위기로 ‘머슴들’은 큰 대가를 치렀다. 정리해고제가 도입되면서 실업률이 단숨에 8.7%까지 치솟았다. 40대 중·장년층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가계 경제는 붕괴했고, 실직자들이 자영업으로 내몰리면서 2002년 자영업자 수치는 사상 최고(621만 명)를 기록했다. 과잉 경쟁으로 자영업 폐업률이 치솟았고, 40대 자살률도 덩달아 높아지는 초유의 비극이 초래됐다. 근로자파견제가 확대되면서 고용불안은 일상화됐다. 청년·여성 등 노동취약계층이 계약직·파견직·일용직으로 내몰리며 비정규직 비율이 50%에 육박했다. 대한민국은 ‘헬조선’이 됐고, 외환위기 전후로 청소년기를 보낸 ‘IMF 세대’는 극심한 경쟁을 버텨냈음에도 안정적인 미래를 기약하기 힘든 ‘88만 원 세대’로 전락해 내 집 마련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N포 세대’가 됐다.
그 이후 나라의 부는 커졌으나 나아진 것은 없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시대가 지속되고 있다. 구직자 1인당 일자리 수인 구인 배수는 외환위기 이후 최저 수준(0.37)으로 떨어졌다. 청년 80만 명이 구직을 포기하고 ‘그냥 쉬었다’고 한다. 반면 60세 이상 어르신은 쉬지 못한다. 취업자가 700만 명을 돌파했다. 노인빈곤율이 40%에 육박하는 탓이다. 법의 보호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 플랫폼 노동자·프리랜서 등 근로기준법·4대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비임금 노동자가 취업자의 30%(862만 명)를 넘어섰다. 장시간 일하고 돈은 적게 받는다. 연평균 노동시간은 1,901시간. 콜롬비아·멕시코·코스타리카·칠레에 이어 OECD 35개국 중 5위로 장시간 근로에 시달리고 있지만 임금은 평균에도 못 미치는 23위다. 안전하게 일하지도 못한다. 지난해 589명이 산업재해로 숨졌다. OECD 국가 중 산업재해 사망률 3위다.
이재명 정부에선 달라질 수 있을까. 이 대통령은 주4.5일제 등 노동시간 단축, 근로기준법 5인 미만 사업장 확대 적용, 중대재해처벌법 강화 등을 공약했다. 하지만 다양한 경제주체들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힌 난제들이다. 한편에선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주52시간제 완화를 요구하는데 다른 한편에선 노동자 건강권을 우려한다.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인구절벽 문제, 인공지능(AI) 기술 혁신에 따른 산업구조 재편 등과도 맞물려 있는 문제다.
결국 한정된 일자리를 어떻게 나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것인지가 핵심이다. 세대간 형평성 문제가 핵심인 정년연장 문제는 연금제도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기술 혁신과 산업구조 재편 또한 노동시장 재조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고용노동은 국민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핵심이다. 여러 부처들과 수평적 협력과 전략적 조정이 가능하도록 고용노동부를 부총리급으로 격상하는 건 어떨까 싶다.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가 민주노총위원장 출신이라고 ‘머슴이 어떻게 압니까’라고 호통치는 사람이 있으려나. 달라진 시대의 풍경은 과거와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이동현 논설위원 na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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