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스테이블 코인이 소환한 ‘자유 은행’ 악몽
민간 은행들이 자체 화폐 발행
대출 늘어 반짝 호황 누렸지만
사기와 거품으로 대혼란 초래

1829년 미국 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앤드루 잭슨은 은행에 부정적이었다. 은행 자본이 정치·경제를 지배하는 거대 권력으로 커져 서민이나 중산층에게는 돈을 잘 빌려주지 않고, 부유층의 이익만 대변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연방정부가 중앙은행을 설립할 헌법적 권한이 없다”는 명분을 들어 중앙은행 역할을 하던 ‘제2 미국은행’의 재인가를 거부했다.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단일 법정 화폐를 발행하는 기관을 없앤 것이다. 1837년부터 1863년까지 27년간 미국은 모든 민간 은행이 국채나 금·은 등을 담보로 자체 화폐를 발행하는 ‘자유 은행 시대’를 맞았다.
자유 은행 시대는 뚜렷한 명(明)과 암(暗)을 남겼다. 지폐를 마구 찍어낼 수 있게 된 은행들이 대출을 늘린 덕분에 철도와 통신 등 사회 인프라가 빠르게 구축되고 경제가 반짝 호황을 누렸다. 미국 서부 개척의 대명사인 ‘골드러시’(1848~1855년)도 이때 일어났다. 하지만 부실 대출로 거품이 커져 뱅크런과 금융 위기가 반복됐다.
또 은행마다 다른 지폐를 발행했기 때문에 큰 혼란이 발생했다. 신뢰도와 안정성이 떨어지는 은행이 발행한 지폐는 거의 통용되지 않았다. 예컨대 테네시은행이 발행한 1달러 지폐는 필라델피아에서 80센트로 교환됐고, 일리노이은행 1달러권은 절반인 50센트 가치밖에 인정받지 못했다. 모든 화폐가 같은 가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화폐의 단일성(singleness of money)’이 깨진 것이다. 충분한 담보 없이 지폐를 발행했다가 야반도주하는 은행도 속출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민간 은행들을 감독하거나 규제할 수 없었다.
결국 민간 은행권이 시장의 신뢰를 잃자 미국은 1863년 국가은행법을 제정해 연방정부가 인가한 은행만 지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강화한다. 자유 은행 시대가 역설적으로 민간 화폐의 발행을 금지하고 은행을 규제하는 근거가 된 것이다.

200년 전 이야기를 꺼낸 것은 미국과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스테이블 코인 때문이다. ‘1코인=1달러’나 ‘1코인=1000원’ 식으로 코인의 가치를 법정 통화와 연동시키는 스테이블 코인 제도화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아마존이나 월마트 같은 민간 업체가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려면 그만큼의 담보를 확보해야 한다. 환금성이 좋은 미 국채가 주로 담보로 활용되기 때문에 그만큼 미 국채 수요가 늘어나고 달러 가치도 오르게 된다.
미 상원은 지난 17일 관련 법안인 지니어스법(Genius Act)을 통과시켰다. 한국에서도 자본금 10억원 이상인 민간 업체가 원화 가치와 연동되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디지털자산기본법이 민주당 의원들 발의로 국회에 올라 있다.
하지만 스테이블 코인은 오랜 역사적 시행착오 끝에 중앙은행이 독점하게 했던 법정 화폐 발행을 민간에 허가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코인 발행 업체들이 충분한 담보를 보유하지 않으면 2022년 테라·루나 사태처럼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단지 투자자 손실에 그치지 않는다. 200년 전 자유 은행 시대처럼 화폐에 대한 신뢰, 더 나아가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과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등은 지난 1일 유럽중앙은행(ECB) 주최 포럼에서 “공공재인 화폐를 보호하기 위해 중앙은행 중심의 규제 체계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원화 스테이블 코인이 불가피한 대세라면, 일단 금융 당국의 감독과 규제를 받는 은행권부터 발행을 허용하고,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방향이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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