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비행사의 첫 고국 비행”… 韓 항공 역사는 여의도서 시작됐다[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조선인 첫 비행사 면허 취득 안창남… 1922년 3만 인파 속 경성 하늘 날아
일제 특별 관제행사 무대로도 사용… 광복 이후 공군 효시 항공부대 창설

《국내 최초 국제공항 ‘여의도비행장’
“세계 어느 나라 공항의 시설에 비해 빈약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판잣집이 있는 공항이기는 하나 국내외의 사신들이 한 번씩은 거쳐 가는 국가의 관문이다. 여하튼 독립 쟁취 이후의 우리 역사는 이곳을 빼놓고는 이루어질 수 없으리만치 무릇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의 인사들이 떠나고 들어오고 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환영과 환송의 가족과 친지들이 환희와 석별의 눈물로 배어진 오막살이 공항이기도 한 것이다.”》
1955년 11월 24일 경향신문에 실린 ‘국제공항 여의도비행장!’ 제목의 기사 중 일부다. 1960년대 김포국제공항으로 그 역할이 옮겨지기 전까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는 비행장이 있었다. 그 연혁은 19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대부터 일본에서 면허를 딴 조선인 비행사들이 여의도비행장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비행사는 매우 희귀한 존재였기에 누군가 비행사 면허를 땄다는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초청 행사가 열렸다. 첫 번째 인물은 1921년 조선인 최초로 정식 비행사 면허를 취득한 안창남이었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려는 열망이 컸던 그는 휘문고보를 중퇴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비행기 면허를 취득한 이듬해 여러 유력자의 후원으로 ‘고국 방문 비행’에 나섰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1922년 12월 10일 안창남은 시내 각 중등 정도, 전문 정도 학생 3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여의도비행장에서 조종간을 잡았다.

안창남 이후 배출된 조선인 비행사 중 눈길을 끄는 인물은 윤공흠이다. 그는 1932년 스무 살의 나이로 일본 다치카와(立川) 비행학교를 졸업하며 최연소 조선인 비행사라는 기록을 세웠다. 윤공흠은 그해 7월 6일 오사카를 출발해 여의도비행장을 거쳐 평양, 신의주, 목포 등을 도는 ‘조선 전국 일주 비행’을 시도했다. 그는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의열단 계열의 독립운동가가 됐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일본군 비행기를 탈취해 요인을 암살하고 총독부 등 주요 관청을 폭격할 대담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연안파의 일원으로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가 1957년 이른바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된 비운의 인물이다.

그렇다면 당시 비행기 여객 규모는 얼마나 됐을까? 1931년 통계를 보면 1년간 여의도비행장을 이용한 인원은 출발 603명, 도착 627명이다. 이 시기 비행기를 이용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이에 매우 작은 규모의 여객 인원이었지만, 아예 수요가 없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본항공수송은 1930년부터 주말을 이용해 목적지 없이 하늘을 선회하는 이른바 ‘유람 비행’을 영업했다. 이용자 통계를 보면 1931년 4∼8월 5개월간 경성 상공을 유람한 고객은 493명이었다. 일본 본토와 대륙을 연결하는 항공로 중 여의도비행장을 경유하는 노선은 계속 확대돼 1939년에는 6개에 이르렀다. 1940년 여의도비행장은 하루 평균 이착륙이 20회에 달했고 ‘내외지를 통해 제1위의 제국 항공의 십자로’라고 불렸다(총독부 체신국, ‘반도와 항공’, 1942년 9월).
여의도비행장은 일제의 특별한 관제 행사의 무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애국기 헌납 및 명명식이 대표적이다. 비행기는 고가의 장비다. 따라서 일본군은 항공 전력을 강화하는 데 국민의 모금과 헌납 방식을 많이 활용했다. 자발적 성의로 포장됐지만, 사실은 반강제에 가까웠다. 1932년 4월 여의도비행장에서는 애국기 10호 헌납 및 명명식 행사가 열렸다. 이날 헌납식은 조선에서 열린 첫 애국기 헌납 행사였다. 때문에 총독, 정무총감, 조선군 사령관을 비롯해 한상룡, 윤치호 등 거물급 친일파까지 내빈으로 임석했다(매일신보, 1932년 4월 18자).

광복 이후 여의도비행장은 한국 항공의 모태가 됐다. 이곳에서 1948년 5월 5일 공군의 효시인 국방경비대 항공부대가 창설됐다. 같은 해 10월에는 최초의 민간 항공사인 대한국민항공사(KNA·Korean National Airline)가 설립됐다.
하지만 여의도는 비행장으로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홍수로 한강의 수위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1년에도 몇 차례씩 비행장을 폐쇄해야 했다. 이로 인해 정부는 여의도의 공항 기능을 김포로 옮기려 했다. 김포는 1930년대 후반 일본군이 새로운 비행장을 건설한 곳이다.
6·25전쟁 이래 김포비행장을 관할하던 미군과의 협의를 거쳐 1961년 국제공항이 김포로 완전히 이전됐다. 이후 신시가지 개발을 시작하면서 공군 여의도기지도 1970년 경기 성남시로 이전됐다. 이로써 ‘반세기 여의도비행장 시대’는 비로소 막을 내렸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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