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골편지]살인미수 가루

어릴 적 우리 집 목사관엔 동네에선 ‘처음’ 갖춘 살림살이들이 여럿 있었다. 교회 손님이 많다 보니 얼음이 얼리는 큼지막한 냉장고가 있었다. 교회에 쓸 피아노도 처음, 어깨너머 피아노를 치는 누이들을 부러워했는데 가끔 내 멋대로 삑사리 연주회, 듣고 있던 참새들이 가소롭다면서 짹짹댔다. 전화기도 동네에선 처음 놓았고, 컬러텔레비전도 아마 몇 번째였던 거 같아. 집에서 극장 구경을 하게 되다니, 참말 별세계 신세계였다.
얼음을 꺼내 먹을 수 있는 냉장고는 여름만 되면 엄지 척, 짱이었다. 돈 내고 사 먹던 아이스크림을 직접 냉동실을 이용해 ‘만들어’ 먹을 수 있다니. 미숫가루를 설탕물에 풀어설랑 적당한 용기에 넣어 냉동실에 얼림. 식인종은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불량식품’이라고 부른다덩만 집에서 만들어 먹는 아이스크림은 불량식품 아님. 미숫가루 얼음을 볼이 빵빵해지게 입에 넣고 굴리면서 여름을 즐겼다. 살인적인 뙤약볕에도, 그나마 살인미수 미숫가루만 있으면 죽지 않고 살아. 구약, 신약, 마약 가루가 다 소용없고 내 사랑 미숫가루면 여름을 날 수 있으리라.
농협 마트에 장 보러 갔다가 멥쌀 보리쌀 미숫가루를 놓고 팔길래 사 들고 왔다. 꿀을 타고 찬물에 풀어 마셨는데 자연스럽게 살인 미소. 엄마가 만들어주셨던 미숫가루 얼음도 기억나고, 얼음을 둥둥 띄워설랑 이가 어덜덜 떨리도록 시원했던 우뭇가사리 냉국도 생각나. 사이좋게 둘이서 반반 나눠 먹었던 내 여동생. 지난겨울 비행기 참사로 하늘나라로 먼저 떠난 여동생 생각이 나서 먹다가 또 울었다. 피식하면, 남몰래 운다.
무책임한, 살인적인 나라에서 고작 미숫가루를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잃은 가족을 그리는 이 심정, 과연 누가 알까나.
임의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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