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유감

기호일보 2025. 7. 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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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경기본사 정치부장
안경환 경기본사 정치부장

얼마 전 동네 놀이터에서 초등학생 몇몇이 한 아이를 두고 추격전을 펼쳤다. 뒤쫓는 아이들은 계속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는 아이의 움직임을 공유했다. 좀처럼 잡히지 않던 아이는 머지않아 멈춰 섰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가쁘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숨을 고른 아이들은 도망가던 학생을 다그쳤다. '사과'하란 말이 전부였다. 학생은 쭈뼛거릴 뿐 제대로 말을 못 했다. 아이들의 한바탕 소란 이유는 간단했다. 도망가던 학생은 함께 어울리고 싶었지만 형들에게 쉽사리 같이 놀자는 말을 못 했다. 대신 형들이 놀던 공을 발로 걷어찬 뒤 도망갔다. 이 행동이 2~3번 반복됐고, 결국 이런 장면이 펼쳐졌다.

학생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도망가던 학생에겐 먼저 사과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함께 놀고 싶다는 말 없이 공을 차고 도망친 행동이 다른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설명도 했다. 학생은 선뜻 알겠다고 답했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 학생을 쫓던 아이들에게도 사과를 권했다. 행동의 잘잘못을 떠나 여러 명이 동시에 쫓으면 피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이해를 구했다. 학생들도 흔쾌히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로써 상황은 일단락됐다.

지난 5월 14일 경기도 공무원 내부 게시판이 갖가지 비판 글로 덮였다. "무슨 낯짝으로 위원장 사무실에 나온 걸까?", "(입에) 올리기도 더러운 말", "잊지 않는 힘이 필요하다. 잊으면 우리는 개·돼지" 등 비난 수위도 거세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지방의원이어서 의회사무처 차원에서 직접 조사를 못한다는 게 답답하다"고 호소하는 글도 있었다.

해당 글들은 이틀 전 같은 게시판에 올라온 '성희롱' 글을 두고 한 비판이다. 도의회 주무관이라는 A씨가 쓴 성희롱 글을 요약하면 비례대표 의원인 소관 상임위원장이 저녁을 먹자고 했고, 이태원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하자 "남자랑 가 여자랑 가?"라고 물은 뒤 "쓰OO이나 스OO 하는 거야? 결혼은 안 했으니 스OO은 아닐 테고"라고 했다. 경기도의회 상임위원장 가운데 비례대표는 양우식(국힘)의원뿐이다.

해당 글이 공개되면서 공무원과 시민단체 등의 반발이 잇따랐다. 양 위원장의 사퇴도 촉구했다. 양 위원장은 국민의힘 도당 윤리위원회에 회부돼 당원권 정지 6개월 및 당직 해임 처분을 받았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경기도청지부의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98%가 양 의원의 위원장직 유지에 반대했다. 더욱이 81%는 양 위원장의 징계 수준과 관련, '제명이 적절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양 위원장은 '성희롱' 발언 사태 이후 단 한마디의 사과도 없다. 경찰 조사에서도 혐의를 부인했다고 전해졌다. 도의회 국민의힘은 "남성 간 대화일 뿐"이라며 양 위원장을 옹호하는 형태를 보였다. 도의회 윤리특별위원회 역시 양 위원장의 성희롱 등과 관련, 징계 여부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시간만 끌고 있다.

양 위원장은 앞서 '언론 탄압' 논란도 있었다. 당시 기자회견까지 자처했고 대부분 사과하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 위원장의 발언은 '사과'가 아닌 '유감'이었다. 유감의 사전적 뜻은 '마음에 차지 아니해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다. 다시 말해 잘못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논란이 된 현상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표출한 꼴이다.

초등학생들에겐 너무나도 쉬운 사과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에 대한 사과도 빠르다. 사과 뒤에는 당사자도, 상대도 더 이상 그 잘못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정치인은 다르다. 남의 잘못에 대해선 크게 질타하고 사소한 잘못까지 끄집어 낸다. 반대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는다. 남 탓만 한다. 내년이면 지방선거다. 이 시기가 되면 시도지사와 시장, 군수, 도의원, 시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에 도전하는 정치인들이 쉼 없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표'를 달라고 읍소한다. 선거 때만 읍소하는 정치인. 그런 정치인을 공천하는 정당. 도민들이 쉽게 잊는다 생각하면 오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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