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54)] 제4회 인천청소년가요제 출신 가수 목비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22년차 가수고요. 여러분들이 많이 좋아하셨던 서울패밀리라는 그룹을 거쳤고, 록(Rock)부터 또 성인 발라드까지 모든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아임프롬인천 이번 차례 주인공은 대중음악 가수다. 활동명은 목비(穆琵), 아름다운 비파 소리라는 뜻이다. 본명은 이선옥. 과거에는 서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목비는 가수의 길을 걷기에는 조금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26세에 안정적 직장을 그만두고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을 이어오며 3만회 넘는 무대에 섰다. 8년 가까운 암투병도 노래를 향한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의 얘기가 궁금해 만남을 청했고 그는 ‘인천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로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목비는 1978년 인천 부평2동에서 태어나 인천부평남초등학교, 부평서여자중학교, 문성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에게 부평2동은 정 많고 따뜻한 동네로 기억에 남아있다.
“학교 마치고 집에 가면 엄마가 안 계셔도 걱정이 없었어요. 누군가 늘 저를 돌봐주셨죠. 동네 이모들이 집 앞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수박을 나눠 먹으며 수다 떠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40여년 전 이 동네 랜드마크는 천주교 부평2동성당이다. 동네에서 가장 근사한 건물이었고, 그도 신자로서 성당을 출석했다.
6살 무렵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피아노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내성적 성격이었지만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당당해지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예술중학교와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할 생각으로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중학교에 진학할 때가 되니 아버지가 강하게 반대해 일반 중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공부를 더 중요하게 여겼고,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 반감으로 그는 피아노를 멀리했고, 중학생이 되면서 어머니께 말해 피아노를 팔았다. 너무나 좋아했던 악기와 이별하면서 절망감이 컸다.

그 무렵 아버지 사업 실패로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당시 유명 브랜드 낚싯대를 제조하는 하청 공장을 운영했다. 중국으로 공장 시설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목비에게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이 “지금은 안 돼”라고 말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도 점점 틀어졌고 결국 이혼했다. 인문계고에 갈 수 있는 성적이었음에도 특성화고를 선택했다. 하루라도 빨리 취업해 가장 역할을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청소년가요제 출전해 입상, 성격도 변화
고교 진학 후 학교에서는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고, 주산·부기·펜글씨 등 취업에 도움이 될 자격증도 여러 개 땄다.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던 고교 2학년 시절. 어느 날 목비의 인생을 바꿔놓은 운명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화학 선생님이 수업 중 졸던 그를 교탁 앞으로 불러냈다. 선생님이 내린 벌칙은 노래였다. 김건모의 ‘핑계’를 불렀다. 김건모 팬클럽 활동도 했을 만큼 그의 노래를 즐기던 때였다. 노래가 끝나자 친구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생애 첫 무대였다.
“너 청소년가요제에 한번 나가볼래?” 드럼을 치는 취미가 있을 만큼 음악에 애정이 깊은 선생님이 목비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봤던 것이 분명하다. 그날 교실에서 선생님이 교단에 그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면, 지금의 목비는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아이였거든요.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렇게 출전하게 됐어요.”

1995년 5월13일 옛 인천시민회관에서 열린 제4회 인천청소년가요제 무대에 오른 목비는 ‘슬퍼하지 마세요. 하얀 첫눈이 온다구요’라는 가사로 노래를 시작했다. 이정석의 ‘첫눈이 온다구요’로, 화학 선생님이 선곡해 준 것이다. 동상 상패와 상금 20만원을 받았다. 그 이후 목비의 성격이 ‘180도’ 바뀌었다. 고교 3학년 때는 전교 부학생회장까지 맡게 되면서 활달하고 외향적인 학생이 됐다.
인천청소년가요제는 1992년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지난해 제33회까지 이어오고 있다. 인천시청소년회관이 개관하면서 시작된 대회였다. 서은종 인천시청소년수련관장이 당시 이 대회를 기획했는데,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서 관장은 “학생들이면 합창이나, 가곡을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 학생이 왜 가요를 부르냐고 이야기하는 교사들도 많았다”면서 “시대가 변했고, 대중가요를 즐기는 학생들도 많았다. 또 이와 관련한 꿈을 가진 친구들에게 발판을 마련해 주기 위해 시작한 대회였다”고 설명했다.
대회는 점점 인기를 끌어 600~700명이 예선에 참가하기도 했다. 대회 출전을 위해 자체 예선을 치르는 학교가 생겨났고, 순수 창작곡으로 출전하는 학생도 있었다. 혼성 그룹 코요테의 신지(7회 장려상), 트로트 가수 김수찬(19회 대상), 가수 안율(29회 동상)이 이 대회 출신이다.
‘음악만 하고 싶다’ 퇴사후 오디션 합격
기획사 폐업에 인천 언더그라운드 활동
많을땐 하루 5곳… 팬들 따라다니기도
성실하고 적극적 학교 생활, 우수한 성적을 바탕으로 고교 졸업 전 삼성전자 취업이 확정됐다.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과해 3학년 초에 최종 합격 소식을 받았다. 어머니는 아파트 이모들과 함께 합격 기념 잔치를 열 정도로 기뻐했다. 그는 다음 해 1월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고졸 신입 업무는 대부분 지점 서무였지만, 인사팀장의 추천으로 인사팀에서 근무하게 됐다. 복리 후생과 휴직·퇴직·복직자 관리 등의 업무를 맡았다. 젊은 나이에 적잖은 책임과 기회를 동시에 얻었다.
외환위기 이후 삼성전자에서도 희망퇴직이 실시됐다. 이직을 고민하던 그에게 IT 벤처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다. 직원 3명의 작은 회사였다. 신선한 아이템과 성장 가능성이 그를 끌어당겼다. 그 회사는 이후 상장사로 성장했고, 목비는 이곳에서 ISO 9001 인증을 직접 주도하는 등 경영 지원 업무를 담당했다. 이후 그는 한 차례 더 IT업계로 이직한다. 두 번째 회사에서는 법인 영업을 맡으며 공공기관 등을 상대로 시스템을 제안하고 계약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땐 대부분 프로젝트가 억 단위였어요. 활달한 성격인데다가 당시엔 여성 영업사원이 드물어 어디를 가더라도 환영받았어요. 실적이 좋았죠. 인센티브도 상당했습니다.”
차곡차곡 직장인 경력을 쌓아가던 목비는 스물여섯의 어느 날, 정말 “음악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직장인 밴드 활동을 하며 틈나는 대로 공연에 참여하고 그룹사운드 오디션에도 종종 도전해오던 터였다. 어머니는 “너 나이가 몇인데 더 늦기 전에 얼른 해. 대신 네 생활은 네가 책임져야 해”라며 승낙했다.
연예기획사 오디션에 합격하고 퇴사했다. 데뷔를 준비하며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시작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자신을 받아줄 기획사가 재정난으로 문을 닫아버렸다.
“갈 곳이 없어진 거죠.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내 인생을 걸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이왕 도전했으니 뭐라도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죠. 자연스럽게 언더그라운드 무대에 발을 들였습니다.”

라이브 클럽이 그의 주무대였다. 고향 인천에서는 계양구에 있는 ‘이종환의 쉘부르’, 남동구에 있는 ‘관수야관수’ 등에서 노래를 불렀다. 특히 유명 DJ 이름을 내건 쉘부르 무대에 서는 가수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당시 인천에는 이러한 클럽에서 활동하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끼리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실력 하나로 인정받는 ‘은둔의 고수’들이 인천에 가득했다고 그는 기억했다. 매일 밤, 많게는 하루에 다섯 곳의 무대를 소화했다. 그의 실력을 인정해주는 팬이 생겼다. 첫 번째 클럽에서 본 관객이 두 번째 클럽에서도 다시 보이는 등 그를 따라 공연장을 옮겨 다니기도 했다. 당시 그의 활동명은 ‘서록’이었다. 록(rock) 음악에 경의(Sir)를 표한다는 뜻이다.

“경인지역에서 서록 하면 그래도 알아주는 그런 가수였죠. 맛집에 줄을 서는 것처럼 그땐 저를 보러 온 클럽 손님들이 ‘웨이팅’을 할 정도였답니다.”(웃음)
매니저 배신·암 발병에도 ‘3만회 무대’
“저를 보며 관객들 힘 낼 수 있었으면…”

언더그라운드에서 실력을 다져가던 그에게 어느 날 가수 서울패밀리 멤버로 함께 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일면식도 없는 가수 위일청씨가 그의 공연을 보고 “너 나랑 노래할래?”라고 말을 건넨 것이다. 당시 너무나 유명한 가수였기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목비보다 앞서 서울패밀리를 거친 여성 멤버로는 김승미, 소찬휘 등이 있다. 그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서울패밀리로 활동하며 수많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활동했다.
목비는 지금껏 3만회가 넘는 무대에 섰다고 강조한다. 정말 거짓이 아니란다. 감기에 걸려도, 몸살로 아파도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투병 생활로 어려움을 겪은 기간을 제외하고 22년 동안 매일 다섯 곳의 무대에 섰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그의 가수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소속사와 매니저의 배신은 그를 지치고 힘들게 했다. 건강에 적신호가 찾아왔다. 8년 전부터 이비인후과 염증 질환으로 큰 수술을 연이어 받았고, 이어 여성암으로 수술받고 최근까지 항암 치료를 이어갔다. 근육이 녹고 머리가 다 빠졌다. 지금도 호르몬 약제를 복용하면서 건강을 점검하고 있다.
그는 음악을 시작한 이후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당장 내일 무대가 있다면, 오늘부터 가슴이 설렙니다. 싫증을 빨리 느끼는 성격인데도 노래하기 싫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무대와 노래는 그에게는 목숨과도 같다. 항암치료 후 3일 만에 무대에 오른 적도 있다.
“힘든 일을 힘들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가 저에게는 항상 노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래라는 끈을 잡는 순간 저는 항상 살아났고, 노래가 있어 언제나 든든했습니다. 저한테는 생명줄 입니다.”
가수 목비의 꿈은 소박하다.
“오랫동안 건강히 노래하는 가수, 그리고 스스로 지치지 않는 가수, 그런 가수였으면 좋겠어요. 저를 보며 관객이 힘을 낼 수 있는 그런 가수가 되고 싶어요.”

/김성호 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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