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고츠키라는 사내가 붙잡은 ‘언어와 사유’ [세상읽기]


이병곤 | 건신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비고츠키라는 사내가 있었다. 1896년 벨라루스 공화국에서 태어나 서른여덟에 폐결핵으로 숨진 옛 소련의 심리학자다. 그의 역작 ‘생각과 말’을 읽었다.
비고츠키의 문체는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다. 많은 원고를 저술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적절히 편집되지 않았다. 때론 병을 앓느라 집필 대신 구술에 의존했으니 더 그렇다. 나는 번역문투라는 장벽 하나를 또 넘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의 실험과 사유 전개를 따라가는 묘한 맛이 있었다. 영유아 시절과 어린이, 청소년 시기를 지나면서 인간의 생각 발달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담대하게 탐색했기 때문이다. 한 문장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고는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성취된다.” 언뜻 보면 문학적인 수사 같지만 사실은 실험과 관찰, 사유의 결과가 드러난 표현이다.
대개 우리는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글이나 말에 담아 표현하는 것이라 착각한다. ‘국민학교’ 시절 ‘반공 글짓기’를 해야 할 때를 떠올렸다. 그 시간에 가장 부러웠던 사람은 ‘인민군’에게 괴롭힘당한 경험이 있는 조부모를 둔 친구였다. 그런 이야깃거리가 없던 나는 머리를 쥐어짜내 억지로 반공 의식을 뽑아내야 했다. 그런 탓인가. 차라리 ‘반공 도서’를 읽고 독후감 쓰기가 훨씬 나았다. 책에는 내가 가져다 쓸 ‘언어’들이 저녁 반찬거리처럼 즐비했다. 비록 내가 맛나게 생각지 않는 식재료였지만 말이다.
이 작은 경험담에서도 아이의 생각은 ‘언어를 붙잡아 성취를 이룬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생각은 하늘에서 툭 떨어지지 않는다. 언어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수천가지 색 레고 블록 놀이 같다. 단어를 고르고, 상황에 맞춰 끼워보고, 해체하고, 다시 결합하는 반복 행동 말이다. 언어뿐만 아니라 숫자를 비롯한 기호 역시 마찬가지 구실을 한다.
말이 없이 생각하기는 불가능하다. 생각하는 힘이 생겨나는 순간도 새 개념과 기호를 익힐 때다. 비고츠키는 “지각, 기억, 주의, 운동이 지닌 정신 기능은 어린이의 상징적 활동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상징적 활동’이란 문서, 사진, 기호 등을 다루는 활동을 뜻한다.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배움에 참여함으로써 내적인 정신 과정을 계속 이어가며, 알고 있던 생각의 구조를 변형시킨다는 의미다.
말이 불안정하면 존재가 흔들린다. 박근혜, 최서원(최순실), 윤석열, 김건희, 김영선…. 이들의 전화 녹취나 인터뷰 자료를 3분만 들어보라. 주어와 서술어 관계가 일치하지 않고,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를 지시대명사가 난무한다. 차라리 ‘머시기허니께 거시기 혀봐’를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
기호를 통해 논리적으로 사유하고, 내적 세계를 차분하게 가다듬기 시작하면 존재는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선다. 이와 달리 다듬어지지 않은 사유 체계 위에 권력 의지와 사리사욕이라는 본능만 작동한다면 사람 사는 세계에 어떤 황망한 일들이 벌어질까.

대안교육 현장에서도 비고츠키의 논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공교육에 비해 놀이와 운동 같은 신체활동, 말하기·듣기·읽기와 글쓰기·토론하기 같은 언어활동의 자유 폭이 상당히 넓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청소년기 인문학, 철학, 과학, 문학 분야에서 ‘고등 정신 기능’을 충분히 자극하며 키워주고 있는지 성찰해봐야 한다.
이 주제를 다루기가 무척 까다롭다. 자칫하면 암기, 경쟁을 위한 시험, 강제를 동원한 주입식 지식 교육을 종용하는 논리로 오인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고츠키는 아동·청소년의 발달을 돕기 위해 ‘근접발달영역’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높은 건물을 지을 때 주변에 비계를 세워주는 것과 같은 원리다. 학생 혼자서 발달하기보다는 주변의 교사와 동료들이 듣고, 읽고, 쓰고, 말하고, 체험과 실험을 병행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생각 훈련을 해나가는 것이다.
어렵다. 교사가 비계를 세워주기도 전에 사교육 기관이나 개인 과외를 통해 아이들은 이미 혼자서 높고 빠르게, 하지만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허약한 쭉정이 빌딩들을 저마다 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요즘 추세를 보면 인간의 생각 기능 거의 전부를 인공지능에 외주화할 기세다. 생각을 만나려면 조만간 ‘사유박물관’ 같은 곳을 가야 할지 모른다. 비고츠키가 한탄할 만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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