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의 명화산책] 황금빛 에로티시즘, 클림트의 ‘키스’

강현철 2025. 7. 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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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철 논설실장


“클림트의 ‘키스’(Kiss)를 보지 못했다면 빈을 떠나지 말라.”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의 교외에 있는 벨베데레 미술관은 매년 100만명 이상이 찾는다. 순전히 ‘키스’를 보기 위해서다. 벨베데레 미술관은 원래 궁전이었던 곳을 합스부르크 황실이 미술관으로 바꿔 개관한 곳인데, 이곳 2층에 ‘키스’가 전시돼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7년. 캔버스에 유채 및 금박. 180×180cm. 오스트리아 빈 벨베데레 미술관 소장.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에로티시즘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 ~ 1918년)는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 중 한 사람이다. 화려한 패턴, 금박, 에로틱한 이미지가 특징이다. 클림트가 인생의 정점에 달했던 순간에 그린 ‘키스’(The Kiss·독일어 Der Kuss, 1907)는 낭만적인 사랑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뭉크로부터 시작된 표현주의는 독일 예술가들에 수용되며, 이 독일 표현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에 표현주의를 심은 작가가 바로 클림트다. 표현주의는 대상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닌 작가의 주관적인 감정, 생각, 주장, 경험 등을 형상화해 표현하는 예술사조다.

사랑과 로맨스의 상징적 이미지가 된 ‘키스’는 꽃이 만발한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두 연인이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려 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갈망과 절망을 동시에 가진 모든 사랑이 그런 것처럼 위태로우면서도 매혹적이다. 꿈속의 세상인듯 남자는 여성을 허공에서 격렬하게 끌어안고 있으며, 남성 품에 안긴 여성은 달콤한 키스를 상상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있다. 남자는 기하학적 무늬와 미묘한 소용돌이 무늬가 새겨진 가운을 입고 덩굴로 만든 왕관을 쓰고 있다. 여자는 꽃무늬가 있는 풍성한 드레스에 꽃으로 만든 왕관을 썼다. 남자는 손을 여자의 얼굴에 감싼 채 얼굴을 숙여 여자의 뺨에 키스를 하고 있다. 여자는 눈을 감고 한 팔은 남자의 목을 감싸고 다른 한 팔은 그의 손에 부드럽게 얹고 있으며, 키스를 받기 위해 얼굴을 위로 향하고 있다.

황홀한 금빛이 화면 전체를 둘러싸고, 반짝이면서 몽환(夢幻)적 분위기는 고조된다. 주위는 고요한 정적 속에 멈춘듯 하며, 화사한 잎사귀의 꽃들은 키스의 축제를 노래한다. 클림트는 그림에 실제로 금과 은, 백금을 첨가한 유화를 사용했는데, 여덟 종류의 금박이 이용됐다고 한다. 금박의 사용은 중세의 금박 바탕 그림과 채색 사본 , 초기 모자이크를 연상시킨다. 클림트가 그림에 금박을 사용한 것은 1903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얻은 영감에서다. 황금빛 광채로 빛나는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과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의 황금빛 비잔틴 모자이크는 금박과 은박의 사용을 이끌었다.

남성의 옷에 그려진 흑백의 네모와 여성의 옷에 그려진 색색의 원형 무늬 등 직사각형과 원형 등 두개의 패턴으로 구분돼 있으며, 배경은 짙은 검정색이다. 그 위에 황금 물감으로 점을 찍어가면서 채색을 넓혀 갔다. 마치 깜깜한 밤의 적막속에 빛나는 황금 비가 내리는 듯한 스포트 라이트 효과가 뚜렷하다. 황금 후광 안에서 하나가 돼가는 모습이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황금 비로 변해 아르고스 왕 아크리시오스의 딸 다나에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미술사학자들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묘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만지려고 돌아서면서 영원히 사랑을 잃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키스’가 세상에 나왔을때 일부 비평가들은 작품이 특별히 독창적이지 않고 다른 예술가의 스타일을 많이 차용했으며, 복잡한 패턴과 금박이 오히려 그림을 손상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여성을 대상화하고, 그림의 감정적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여성의 관능미를 강조한 ‘키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성(性)에 대한 사회적 금기와 규율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진실을 예술로 밝히려고 노력했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르 누보(Art Nouveau)도 클림트에 영향을 끼쳤다. 곡선과 황금빛의 장식성이 바로 그것이다. 아르 누보는 자연 형태에서 영감을 받은 장식적인 디자인을 강조하고 이전 세기를 지배했던 예술의 학문적 전통을 거부한 것이 특징이다.

‘키스’는 대중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수많은 예술, 음악 및 문학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두 연인이 포옹하는 이미지는 포스터, 인쇄물, 의류까지 다양한 형태로 재현됐다. 2001년 ‘아멜리에’ 등 여러 영화와 TV 쇼에서 언급됐으며,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그림을 되찾기 위한 마리아 알트만의 투쟁을 다룬 2015년 영화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의 줄거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림의 이름인 ‘키스’는 클림트가 아닌 후대에 지어진 것이다. 1908년 5월 빈(비엔나)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식 60주년을 기념하는 ‘쿤스트샤우’(Kunstshau·예술 전시회)에 처음 전시될때 카탈로그에 적힌 제목은 ‘연인’(Liebespaar·사랑하는 남녀)이었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사랑, 친밀함, 그리고 성을 평생의 주제로 삼은 클림트는 비혼(非婚)이었지만 여성 편력이 적지 않았다. 작품 속 여인은 그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유부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나, 사돈지간이자 연인 관계였던 에밀리 플뢰게로 추측되고 있다.

당시 성공한 의상 디자이너인 플뢰게는 유언장에서 재산 절반을 남길 만큼 클림트에겐 사실상 아내와 다름 없었다. 클림트가 뇌졸증으로 쓰러지며 사망 직전 남긴 말도 “에밀리를 불러와” 였다.

이 두 사람은 클림트의 초상화로 후세에 살아 남았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1’는 2006년 무려 1억3500만달러에 팔폈으며,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2’는 2016년 1억5000만달러에 판매됐다.

화려한 황금색과 장식적 형태를 애용하던 클림트는 부드럽고 달콤하면서도 어딘지 ‘쌉쌀한’ 그림들과는 달리 19세기 오스트리아를 발칵 뒤집은 미술계의 제임스 딘과 같은 ‘희대의 반항아’ 였다. 에곤 실레의 누드화도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클림트는 1862년 빈의 남서쪽 바움가르텐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성탄절에 조차 먹을 게 없을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귀금속 세공사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에다 성공에 대한 끈질긴 열정이 결합돼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화가가 됐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명문 빈 미술공예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과 함께 친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프란츠 마치와 함께 주문을 받아 예술작품을 제작해주는 ‘예술가 컴퍼니’ 창업했다. 신 부르크 극장 내부 벽화인 ‘구 부르크 극장의 내부’, 빈 미술사 박물관 내부 벽화 작업 등을 통해 세속적 성공을 거둔다.

20대까지만 해도 그는 르네상스 이후 이어져온 고전적인 화풍을 고수했으며, 화사하면서도 뚜렷한 색채를 활용했다. 30대때 친동생과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삶에 브레이크를 걸고 절망에 빠트렸다. 작품 경향이 달라진 건 이때다. 클림트는 당시 오스트리아 미술계를 장악한 ‘빈 미술가협회’에 반기를 들며 시대의 반항아로 재탄생하게 된다. 마네, 모네 등으로부터 시작된 파리의 인상주의와 ‘새로운 예술을 하자’는 아르 누보 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1897년 35세의 클림트는 ‘분리주의 그룹’(빈 분리파)을 결성, 빈 미술가협회와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이라는 잡지도 만들고, 빈 한복판에 ‘제체시온’이라는 분리주의 전시관도 열었다.

‘팔리스 아테나’


제체시온 정면에는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어 획일화된 정신으로부터 탈피, 자유로운 정신의 추구를 알렸다.

1898년 두번째 분리주의 전시회에서 ‘팔리스 아테나’를 선보인다. 클림트는 전쟁의 신 아테나처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주류 미술 세계와 전쟁을 선언한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스스로 황금빛 창을 들고 아테네 여신이 되기를 자처한 그의 분리주의 정신은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라를 탄생시킨다.

1899년 성서의 이브를 상징하는 ‘누다 베리타스’(Nuda Veritas·벌거벗은 진실)를 선보인다. 제체시온의 기관지 ‘베르 사크룸’ 1898년 창간호에 그린 습작품을 이듬해 유화로 그린 작품이다. 그림 위에는 “너의 행동과 예술 작품으로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없다면 소수의 사람을 만족시켜라.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왼쪽부터 ‘철학’ ‘의학’ ‘법학’


클림트는 1918년 56세의 나이에 뇌졸증으로 사망한다. 세상을 뜨기 전 남긴 마지막 작품이 ‘아기(요람)’ 다. 평생 ‘여성’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그는 마지막에 ‘아기’로 돌아온다. 그가 죽자 14명이 친자 확인 소송을 냈고, 이가운데 4명이 자식으로 판명되기도 했다. 에로티시즘과 강박증, 지나치게 화려한 아르 누보 양식은 당대 비난을 받기도 했다.“진실은 불과 같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불이 붙어 타는 것과 같다”고 했던 클림트, 이 말처럼 그는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갔다.

강현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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