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가는 솜이불의 포근함, 장인의 손길은 대를 이어간다

문준영·조승주 기자 2025. 7. 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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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가게, 고치가게] (17) 제주시 이도2동 양지솜공장

제주시청 뒷골목, 세월이 흔적이 가득한 흰색 건물에는 1958년생 동갑내기 오병일 손영란 부부가 40년째 운영 중인 양지솜공장이 있다. 도내 150개 업체에 솜을 공급하는 거점이자 빼어난 손기술로 만든 솜이불로 오랜기간 도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이들의 역사는 6.25 직후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 오병일 사장의 아버지 故 오재윤(1929년생)씨는 1953년부터 부산 진시장에서 백일솜공장을 운영했다. 부산 서면 출신인 오씨와 아내 손영란 씨는 고등학교 시절 같이 공부를 하다 만나게 됐다. 그렇게 스물셋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제주에서부터 부산을 찾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보고는 1대 사장 오재윤 씨는 아들 오병일 씨에게 '제주도로 가서 공장을 하나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1981년 제주로 건너왔고, 1986년 지금의 자리에 양지솜공장을 마련했다.

"그 당시에는 제주도에 솜공장 같은 게 없으니까 부산 진시장에 와서 혼수품을 많이 해갔어요. 아버지 말 들어보면 물건을 포장해서 배로 붙여줬어요. 특히 부산 영도에 친척들이 사는 경우가 많으니까, 진시장에 와서 우리를 소개해주면 많이 포장해서 이리로 보냈죠."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는 가게의 전성기였다. 지금보다 솜이불을 많이 썼고, 혼수에도 필수품이었다. 8월말부터 추석까지가 대목이었다. 직원까지 채용했지만 일손이 부족해 24시간 3교대로 일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새벽 2~3시까지 일을 하고 잠깐 눈 붙였다가 아침에 애들을 깨워서 학교에 보내놓고 다시 일하는 생활이 반복됐다. 지금도 9월부터는 일요일이 없단다.

부친의 안목과 아들의 성실함, 그리고 바느질 하나 만큼은 자신 있는 며느리의 손재주까지 더해지며 양지솜공장은 자리를 잡았다.
양지솜공장의 부부는 오늘도 함께 힘을 합쳐 솜이불을 만든다. ⓒ제주의소리

"딴 데서는 못했던 거 다합니다. 솜을 놓는 게 다른 사람들하고 달라요. 솜이 안 갈라지게, 안 잘리게 하는 그술, (특정 부분) 솜이 줄지 않게 하는 것도 기술이에요. 그걸 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충 놓는 게 아니라, 우리 집사람의 기술이자 노하우죠."

지난 세월, 별별일이 다 있었다. 솜을 태우려고 이불을 가져왔는데 안을 보니 온갖 폐물이 있었던 일, 친척 형제들을 위해 답례품으로 쓰겠다며 이불을 27개나 주문했던 고객, 과거 혼수로 이 곳에서 솜이불을 해갔던 손님이 이제는 자식을 결혼시키게 돼 손을 잡고 이 곳으로 찾아온 경우도 있다.

"마음에 든다면서 집에 가서 이불 세팅을 다 하고 사진을 보내주시는 분도 계세요. 이제 사양길이지만 그래도 솜을 선호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힘들어서 장사를 그만할까 하다가도 손님들이 좋아하고 이러면 거기에 힘을 받아서 계속 하고 있습니다. 이 곳은 저에게 그냥 인생의 전부에요. 우리 젊은 청춘을 다 바쳐서 갈아넣은 것이기 때문에 솜공장이 없으면 우리도 없어요. 그 정도로 우리에겐 많은 애환도 있고 추억도 있어요."(손영란)

"이 덕에 자식도 키우고, 손주들도 보고. 그리고 뭐 집사람하고 같이 일을 하니까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보람 있게 한 거는 목화솜을 단 한 번도 양심을 속여가면서 나쁜 솜을 섞어가며 팔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손님께 물건을 팔 때는 평생을 보장하고 팝니다. 손님들이 한 번 해가시면 좋으니까, 또 오고, 또 오고 하니까 이 때까지 장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죠. 그렇게 많이 찾아주시니까 고맙죠."(오병일)
섬세한 손기술은 양지솜공장만의 자랑이다. 한 번 그들의 실력을 확인한 고객은 단골이 됐다. ⓒ제주의소리

솜공장의 해는 저물지 않는다

큰 아들인 오상진(1981년생)씨가 가업을 물려받기로 한 것은 부부에게 정말 큰 기쁨이다. 상진 씨는 어려서부터 솜과 함께한 부모님의 삶을 보고 자랐다. 

"원래는 여기 가게 바로 뒤가 집이었어요. 조그마한 단칸방에 어머니 아버지 동생하고 저 이렇게 4명이 살았었거든요. 잠을 잘 때나, 낮에나 보면 항상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났어요. '쿵쾅쿵쾅, 쿵쾅쿵쾅' 그런 소리를 듣고 자랐고, 손님들이 북적북적한 모습을 보고 자랐어요."

어머니 손영란 씨는 "아들 뒤에서 우리가 보조해가면서 계속할 것"이라며 "아들이 완벽하게 배우면 손 뗄 것"이라고 말했다. 아들 상진 씨는 "어머니가 솜을 만드는 그 과정 자체는 솔직히 저도 아직까지 흉내내기가 힘든 영역"이라며 여전히 부모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목화솜을 한 번 사용하면 진짜 30년에서 100년까지도 사용을 한다"며 "요즘엔 아토피나 비염이 있는 분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시대는 변했지만 양지솜공장의 도전은 계속된다. 아들은 이제 SNS마케팅과 온라인 판매 등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 제주를 넘어 전국 곳곳에서 주문이 이어진다는 것이 참 다행스런 일이다. 품질과 기술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밑천이다. 정직하게 좋은 솜을 고집하면 반드시 좋은 반응이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이들 가족은 오늘도 열심히 땀을 흘린다.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 옛날에 다른 집도 있었을텐데 우리집까지 그냥 먼 데서도 찾아와주시고 이러니까, 또 믿어주시니까 고맙습니다.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건)단지 다른 건 없고 믿음이고, 바느질 정성껏 해드린다 그거예요."(손영란)

6.25 직후 시작된 가업은 이제 제주에서 대를 넘어가고 있다. 이들은 포근한 미소를 품은 채 오늘도 제주시청 뒷골목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남편 오병일 씨, 아들 오상진 씨, 아내 손영란 씨가 가게 앞에 나란히 섰다. 이들 가족은 양지침구/솜공장과 백일솜공장(백일면업사)을 함께 꾸려가고 있다. ⓒ제주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