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인간을 구원하리니”… 순수·사랑·그리움의 아이콘[추모합니다]
“문학이 시가 우리를 구한다고 외치던,/ 참 젊기도 하여라, 윤후명 소년이여// 어디까지 가셨는가, L과 K 마중 나오셨는가, 거기에도 능소화 핀 그대 작업실이 있는가.”
지난 5월 8일 이 세상을 떠난 윤후명 영결식에서 학창 시절부터 같이 시를 써온 절친한 문우 강은교 시인이 쓴 조시 한 대목이다. 은하수 건너왔다가 또 은하수 건너 건너 어디까지 가고 있느냐 묻고 있는 시에도 분명히 드러나듯 문학이 우리를 구한다며 우리 시대 순수와 사랑과 그리움의 고향이 된 사람이 윤후명이다. AI가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그림도 그럴듯하게 그려주는 이 시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변할 수 없는 인간의 정체성, 사람의 아이콘이 윤후명이다.
1946년 태어난 윤후명은 용산고와 연세대를 졸업했다.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1979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됐다. 명문 학교와 문학 최고 등용문인 신춘문예를 너끈히 통과한 엘리트였다. 그러면서도 삶과 문학에서 그런 걸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가장 낮은 자세로 삶의 신산고초(辛酸苦楚), 쓰고 맵고 쓰라린 삶을 겪으면서도 사람으로서는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되는 사랑과 순정과 그리움을 온몸으로 살아가며 문학을 일궜다. 그래 우리 사회와 시대를 사람다운 세상으로 영원히 살아가게 한 사람이 윤후명이다. 그런 삶과 문학을 진솔하게 자백한 듯한 ‘고향’이라는 시 한 편 다시 읽어본다.
“언젠가는 가려고 했던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서 떠돌다가/ 젊어서도 늙어 있었고/ 늙어서도 젊어 있었습니다/ 무지개가 사라진 곳에 있다고도,/ 사랑이 다한 곳에 있다고도,/ 슬픔이 묻힌 곳에 있다고도,/ 짐짓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인지 그곳은 끝끝내 멀고 아득하여/ 세상 길 어디론가 헤매어갑니다/ 꽃 한 송이 필 때마다 그곳인가 하여/ 영원히 머물면서 말입니다.”
윤후명은 젊어서도 늙어서도 세상 길 어디론가 헤매었다. 아니 머무름과 떠남이 함께하는 헤맴의 영원한 출발선상에 있었다. 우리네 이율배반의 실존적 삶이 그러하듯. 인간의 순수 혼, 사랑과 그리움의 근원 혹은 고향의 참모습을 자신과 모두에게 유토피아 혹은 저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서 보여주고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삶이 그랬고 시와 소설이 그랬다.
1991년 나는 윤후명 등과 함께 중국 여행을 10여 일 갔다 왔다. 백두산 거쳐 북경, 상해 등지를 여행하던 초반에는 왠지 술을 한사코 사양하던 술고래가 서역 사막과 초원길이 시작되는 둔황에 가서는 넋 놓고 마셔대기 시작했다. 사랑해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율배반의 사랑을 그리면서도 ‘소라고둥이 천년이 지나면 파랑새가 된다’며 영원과 순수를 꿈꾸던 작품의 무대, 모래 속에 묻힌 전설의 왕국 둔황과 누란 사막에 와 막무가내로 술만 마셔댔다.
순간과 영원이 혼재된 도시, 둔황의 실제를 술 취한 순수 혼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마셨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그런 윤후명 작품들을 ‘자멸파’라 했다. 운명적으로 외로움과 순진무구로 태어난 나르키소스들. 해서 스스로 자멸해갈 수밖에 없는 자멸의 미학이 휘황찬란하게 빛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니 포스트휴먼이니 하며 속도도 따라잡기 힘든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자멸할지 뻔히 알면서도 끝끝내 인간의 순수 혼을 지켜낸 사람이 윤후명이다.
오늘 이 글을 쓰며 윤후명이 즐겨 그려 화가로도 우뚝 서게 한 엉겅퀴꽃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헤매고 다녔던 사막과 초원과 파미르고원 등 어떤 환경에서도 ‘나 엉겅퀴꽃이다’며 피어오르는 꽃. 붓끝마다 화산 폭발 같은 불꽃 리비도가 갈가리 터져 나고 있다. 짙은 녹색 씨방이 폭발해 붉디붉은 꽃술 피어나며 먼, 먼 그리움을 선연히 보여주고 있다. 해서 ‘윤후명’이란 이름이 우리 시대의 마지막 순정주의자요 예술주의자, 로맨티시스트요 휴머니스트로서 신화적 사랑임을 지금, 오늘에도 선연히 보여주고 있다.
이경철(문학평론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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