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엑스레이] [77] 프라다를 입는 악마가 물러났다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2025. 7. 1.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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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특정 업계를 잘 모르는 사람도 아는 이름이 있다. 멸종 직전인 내 직업군에도 있다. 고(故) 로저 이버트다. 영화 평론계를 모르는 사람도 이름은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1975년 퓰리처상을 받은 첫 영화 평론가다. 아마 최후의 영화 평론가로 남을 것이다.

이버트가 유명해진 것은 영화 평론을 대중의 품에 안겼기 때문이다. 그가 등장하기 전 평론은 현학적이고 배타적이었다. 이버트는 쉬운 언어로 평론을 썼다. 대중을 위한 가이드였다. 평론에 별점을 도입한 것도 그였다. 진중한 영화광이 혐오한다고 불평하면서도 몰래 찾아보는 그 별점 말이다.

패션계를 모르는 사람도 아는 이름이 물러났다. 미국 패션 잡지 ‘보그’ 편집장 애나 윈터다. 37년 만에 편집장직을 내려놓았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실제 모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유명한 이유는 악마처럼 독해서만은 아니다. 독하기만 해서 유명한 사람은 없다. 진중권도 베스트셀러를 쓴 미학자였다.

윈터의 업적도 이버트와 같다. 패션을 대중의 품에 안겼다. 그가 등장하기 전 패션 잡지는 고답적이고 배타적이었다. 윈터는 모델만 등장하던 ‘보그’ 커버에 대중적 유명인을 처음으로 실었다. 모델에게 50달러짜리 청바지를 입힌 그의 첫 커버는 전설적이다. 힐러리 같은 정치인 커버도 혁신적이었다. 지금은 다들 그렇게 하니 놀라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윈터 시대가 끝났다. 필연적인 끝이다. 더는 패션 잡지가 유행을 선도하지 않는다. 영화 평론가와 같은 운명이다. 지금의 윈터는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들이다. 이버트는 유튜버들이다. 두 사람은 패션과 영화 평론을 민주화했다. 그 민주주의는 더욱 민주화되어 무정부주의로 진화했다. 이제 패션계와 평론계에 대통령은 없다.

윈터는 ‘아마존’ 제프 베이조스와 결혼한 새 아내를 새 커버로 공개하기 직전 사임을 발표했다. 거대 테크 기업 대표의 신부를 얼굴로 내세운 ‘보그’의 선택에 한탄이 쏟아졌다. 모델도 셀러브리티도 정치인도 아닌 억만 장자의 시대가 왔다는 신호다. 윈터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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