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인생에서도 ‘앙코르’가 있길

문형 소설가 2025. 7. 1.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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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 소설가

음악 공연장에서 청중이 추가 연주를 요청하거나 청중의 갈채에 보답하고자 연주자가 프로그램 외 추가로 연주하는 일을 ‘앙코르’라고 하는데, 영어 사전상으론 명사다. 하지만 프랑스어 ‘앙코르(encore)’는 부사로 ‘다시’ ‘재차’라는 의미다. 프랑스어 ‘앙코르’는 와인과 관련해 많이 사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앙코르 하이트 메들리’ ‘도멘 뒤 포시블 당스 앙코르’와 같이 특정 브랜드나 품종에 ‘앙코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그렇다.

나에게도 와인 ‘앙코르’에 얽힌 일화가 있다. 소설 쓰기로 전업하기 이전에, 나는 쭉 광고기획 일을 해왔다. 스물일곱 살이던 1989년, 부산지역에서는 알아주던 광고기획 회사의 기획관리실장을 맡고 있었다. 바로 그해, 부산의 소주 업체인 대선주조에서 ‘앙코르’라는 와인을 출시했다.

대선주조에서 만든 ‘앙코르’는 화이트 와인으로 포도 품종은 ‘샤르도네’였다. 함안 여항의 계약 재배 농가로부터 포도를 공급받아 생산 준비를 마치고, 그해 추석 시즌을 겨냥해 8월 중순에 ‘론칭(launching)’하기로 예정됐다. 이 론칭 광고 프로젝트를 우리 광고기획사가 수주해 7월 이맘때 제작에 들어갔다.

제대로 조직이 갖춰진 광고대행사에서 광고 제작을 진행할 땐 총괄 책임을 맡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필두로 카피라이터, 아트 디렉터, 촬영 감독(PD), 그래픽 디자이너 등이 한 팀을 이루어 진행한다. 하나 부산에선 광고기획사라 해봤자 워낙 영세한 데다, 부채 더미에 놓여있던 당시의 그 광고기획사에선 이런 조직을 갖출 여력이 없었다. 결국 내가 경영 관리에서부터 카피라이터, 촬영 감독, 제작 진행 역할까지 도맡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아무튼 제작부 직원들을 데리고 ‘앙코르’ 와인을 촬영하러 서울로 가 제품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강남에 있는 와인 바를 빌렸다. 그 와인 바를 사용하려면 영업이 끝나야 했으므로, 자연히 촬영은 첫새벽쯤에야 비로소 시작됐다. 한 개짜리 단품 촬영과 두 개짜리 선물 세트 촬영을 모두 마치고 나오니, 해가 빌딩 위로 떠올라 있었다.

여관에 들러 잠시 눈을 붙이고 스튜디오로 나가 현상 되어온 슬라이드를 확인하던 스튜디오 실장과 나는 경악했다. 이런! 두 개짜리 선물 세트의 와인 색깔이 달라 ‘짝짝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레드 와인은 말 그대로 레드 와인 색깔이어서 병의 반사 빛만 잡으면 촬영이 수월하다. 하지만 화이트 와인은 거의 무색이어서 와인을 살리려면 알맞은 배경지를 덧대 촬영해야 한다. 그래서 단품 촬영하는 동안 제작부 직원들에게 선물 세트 와인의 배경지 처리를 해놓으라 일렀건만.

직원들 딴에는, 두 개짜리 선물 세트의 한쪽 와인 병에만 배경지 처리를 해놓고서 단품 촬영이 끝나면 그 와인 병의 배경지를 떼다 다른 쪽 와인 병에 붙일 요량이었다가, 막상 선물 세트 촬영할 땐 그 배경지를 떼다 붙이지 않아 사달이 난 터. 다시 와인 바를 빌려 야간 촬영을 하려는데, 이런 우라질 직원들을 봤나!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앙코르’ 와인을 따서 다 마셔버렸다질 않은가. 그건 광고용 시제품이었고 본 제품 생산은 8월 초에 한다는데 말이다.

내용물이야 다른 화이트 와인으로 채우면 된다지만, 와인 병마개는 압착이 특이한 데다 내부의 코르크 마개까지 맞춰야 하므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다행히 손재주 있는 사람을 찾아내 그럴싸한 와인 병으로 만들어 광고 제작을 무난하게 마쳤다. 그렇게 론칭은 되었지만 ‘앙코르’ 와인이 시장에 정착하진 못했다. 대선주조의 ‘그랑쥬아’ 샴페인 광고는 서울의 광고대행사 제일기획이 제작했는데, 그쪽의 광고 기획안도 우리 쪽과 같이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취향의 다양화·고급화로 와인 수요가 늘 것이라고 보았으나 눈에 띄는 증가는 없는 것 같았다.


사실 와인 분야에서 ‘앙코르’란 말은 브랜드로서 뿐만 아니라 한때 인기를 끌었던 와인을 재판매하거나 와인 이벤트를 다시 개최하는 경우에도 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즉. 비록 ‘앙코르’ 와인은 시장에서 일어서지 못했지만 내 인생에선 ‘앙코르’ 기회가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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