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낸 한철] 맨발걷기

맨발걷기가 붐을 일으킨 지는 한참 되었다. 건강에 대한 관심과 삶의 여유, 지자체마다 다투어 조성한 쾌적한 환경 덕분이겠다. 아침 산책길의 맨발걷기는 내 삶의 루틴이 된 지 오래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시원한 산들바람을 일으켜 몸과 마음이 상쾌해진다. 우리 발밑에는 꽃들이 피어난다…" 틱낫한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땅과 맨발의 접촉이 주는 상쾌함과 몸에 스며드는 자연의 정념(淨念)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맨발걷기 하는 사람을 만나면 말 건네고 싶고 함께 걷고 싶은 친근감이 생긴다. 그것이 비록 우범자의 것이라 할지라도 맨발은 착해 보이고 맨발은 잘못이 없어 보이고 맨발은 늘 묵언수행 중인 것처럼 느껴진다.
맨발걷기 명소를 추천해달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문경새재 옛길을 권하겠다. 주흘관에서 조령관까지 시오리 길은 자연환경도 환경이려니와 역사를 숨 쉬는 맨발걷기까지 할 수 있어 탐나는 곳이다. 문경새재 옛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간선도로였다. 기록으로 혹은 구전으로 선비며, 민초며 이곳을 오고 간 옛 사람들의 숨결이 곳곳에 남아있다. 서애 류성룡이 새재에 묵으면서(宿鳥嶺村店) "보이는 세상사 어지러운데/ 몸 밖의 헛된 명성 구름과 같은 것/ 비 개인 뒤 대숲에 홀로 앉아서/ 시냇물 바라보며 내 마음 씻어보네"와 같이 먹을 갈아 시를 쓸 때, 글을 모르는 민초들은 한 맺힌 마음으로 "문경아 새재 고개는 왠 고갠지/ 구부야구부야부가 눈물이 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와 같이 아리랑을 부르며 한 많은 삶의 고개를 넘는다.
선비들의 개운한 맨발과 민초들의 땀 젖은 맨발, 그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 내 맨발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최근에 출간한 시집 '경과보고'의 키워드는 맨발과 그림자이다. '맨발'과 '그림자'라는 이미지로 지난 삶을 성찰하셨는데, 이 두 상징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한 언론사 기자의 물음에 "맨발은 카를 융의 용어인 자기(self)의 표상이고, 그림자는 자기실현에 태클을 거는 내적 상흔입니다." 라고 답했다. 태클을 벗지 않고서는, 헤르만 헤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시가 다름 아닌 나를 찾아가는 고단한 여정이라면 흙 묻은 신발을 신고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여호와가 양치는 목동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었겠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모세가 들은 여호와의 부름은 '내면의 소리'이자 '침묵의 소리'이다. 종교적 관점을 떠나 이해한다면 그것은 존재의 근원인 자기(Self)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이다. '네가 선 거룩한 땅' 또한 마찬가지다. '참된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고독의 시간과 터부(Taboo)의 공간일 뿐 별유천지가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호렙산 떨기나무 앞에 이르기까지 모세에게는 40년 동안의 산전수전이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동족 히브리인들의 해방서사, 출애굽의 주역으로 탈바꿈한 무명의 목동을 생각해 보라. 산전수전이 맨발의 연료라면, 맨발은 가야 할 길을 마땅히 가는 탈바꿈의 엔진이다. 내 시의 '맨발'도, 우리네 일상의 맨발걷기도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