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3.1운동 서울 보다 먼저 광주서 전국시위 기획했다 [광주전남 독립운동 현장 50]

이건상 기자 2025. 7. 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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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만세 시위 비밀조직 신문잡지종남소(하)
광주공원 건너편 옛 광주장터. 1919년 3월10일 광주 3.1운동의 시발지였다.
옛 광주 큰장터였던 광주공원 거너편 광주천변.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 30분. 광주공원 아래 광주천 모래사장에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김복현·김강·서정희가 만세를 외쳤다. 광주 3·10 만세 시위의 시작이었다.

시위대는 부동교 작은 장터로 향했다. 때마침 양림 방면에서 달려온 숭일학교, 수피아 학생 130여 명이 합세했다. 시위군중은 금새 1천 여 명으로 늘었다. 시위대는 김복현 등의 지휘를 받아 서문통을 거쳐 우편국(충장우체국)으로 행진했다. 숭일학교 농감인 송흥진이 대형 태극기를 휘날리며 선두에 섰다. 태극기를 따라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소리를 내 지르며 힘차게 행진했다.
1920년대 부동교 일대 광주광역시 제공

독립운동가 고 최한영 선생은 "쌀 장사는 쌀 되박을 높이 들고, 식육점 주인은 저울을 들고, 양은 그릇 장사는 양은 그릇을 두들기며 만세를 외쳐댔다"고 회고했다.

시위 군중이 지금의 충장로 1가 우체국 앞에 이르자, 일본 기마 헌병대가 출동했다. 시위 주동자를 체포하려하자 뜻밖의 상황이 연출됐다. 군중들이 "우리가 자진해서 경찰서로 가겠다"며 광주경찰서 앞마당으로 몰려 들어갔다. 경찰서가 시위대에 점령될 지경이었다.

일제는 소방대·재향군인회까지 동원,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렀다. 15~16세의 어린 여학생들을 군홧발로 짓밟았다. 일본 헌병은 수피아 여학교 윤형숙의 왼팔을 일본도로 내리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날 60여 명의 시민과 학생이 체포됐다. 이들 가운데 43명은 오후 10시께 감옥으로 압송됐다.
일제 강점기 당시 광주 작은 장터인 부동교 일대. 광주광역시 제공

# 양림동 남궁혁 목사 자택에서 비밀 회의

광주 만세투쟁은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됐다. 일단의 청년들이 3월6일 밤 광주 양림동 남궁혁 집에 집결했다. 양림교회 교인인 김복현(김철), 김강, 최병준, 황상호, 강석봉, 한길상, 최영균, 김용규, 서정희, 김태열, 홍승애 등이 자리에 앉았다.

이들 중 일부는 삼합양조장 회원이기도 했다. 삼합양조장은 1917년 광주에 들어선 신문잡지종람소(신문 등을 열람하는 문화공간)가 1918년 이전하면서 내붙인 위장간판이었다. 신문잡지종람소는 광주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출신들이 운영하는 비밀결사체였다.

이날 밤 결정 사항은 6가지였다. ▲8일 큰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개시 ▲독립선언서 등의 인쇄는 시내 조선인 청년이 담당 ▲인쇄용지 1만장은 강석봉이 구매 ▲인쇄용기는 숭일학교 소장의 등사판을 사용 ▲최병준·손인식· 송흥진은 숭일학교 생도를 담당 ▲김태열은 광주보통학교 생도를 담당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은 "독립선언서 인쇄를 담당할 '시내 조선인 청년'은 비밀독서회 모임인 삼합양조장 회원을 지칭하고 있으며, 강석봉이 인쇄용지 구매인으로 선정된 것은 직업이 상점 점원으로 종이를 파는 시내 일본인 상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시위 임무가 정해지자 모의 참가자들은 각자 맡은 일을 열성적으로 추진했다. 숭일학교 농감인 송흥진과 교사 손인식은 숭일학교 소유의 등사판 2개를 가지고 와 남궁혁의 집에서 김강에게 건넸다. 강석봉은 7일 아침 일찍 시내 조창(朝倉)·대강(大岡) 상점에서 백지 만장을 3천원에 구매하여 한길상에게 전달했다.

한길상, 김용규 등은 남궁혁 집에서 3·1독립선언서 등을 인쇄하려 했다. 그러나 기계 작동이 잘 안되어, 수기옥 정(지금의 충장로 주변)의 김언수 집으로 옮겨간 후 독립가, 태극기 등을 인쇄했다. 김언수 집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 8일 다시 옮긴 세 번째 장소가 광주면 향사리 최한영 집이었다.

이날 최정두는 개인 소유의 등사판을 가지고 합류했다. 8일부터 9일 저녁까지 최한영을 비롯한 김용규, 최정두, 범윤두, 김종삼, 한길상 등은 방문을 이불로 가려 놓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 천장의 3·1 독립선언서와 '경고 아 2천만 동포'라는 격문, 애국가 및 독립가 등을 인쇄했다. (노성태 논문 '광주 3·1운동의 재구성')

3월6일 남궁혁 집 시위모의자 가운데 강석봉, 한길상, 김용규, 김태열 등은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이었다. 특히 김태열은 광주보통학교 촉탁교사로 3월 17일에 열리는 송정리 만세 시위도 주도했다. 김용규도 10일 뿐 아니라 17일 송정리 시위 주동자이며, 최한영은 유인물 인쇄와 농업학교 학생들을 동원하는 임무도 맡았다.

광주 3.10 만세 시위는 실상 광주 신문잡지종람소 비밀회원들이 주도한 셈이다.

#3·1만세 운동 전 서울 광주 동시 시위 계획

신문잡지종람소 비밀조직은 1919년 2월부터 대규모 시위를 준비한 듯 보인다.

광주 출신으로 도쿄 메이지대학에 유학 중이던 정광호는 유학생 11인이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발표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1월말께 국내로 들어왔다. 그는 2월 2일 서울에서 광주 출신으로 경성의전에 재학 중인 김범수와 동향인 박일구, 최정두와 만나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배포키로 했다.

이들은 인쇄 장소로 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김기형의 집으로 정하고 2월 4일께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 도착 후 ▲박일구 ▲김범수 ▲김태열 ▲정광호 ▲최정두 등 5명은 등사판과 용지를 준비, 대량의 유인물을 제작했다.

이들은 광주와 서울에서 동시에 대규모 시위를 전개할 작정이었다. 이는 광주 3·10 시위가 서울 파고다 공원의 만세 시위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광주의 비밀 조직을 통해 일단의 청년들이 독자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기획했음을 보여주는 것.
조선독립광주신문 1호.

#조선독립광주신문 이튿날 뿌려져

3월 10일 시위가 사그러들자 광주 시내에 '조선독립광주신문'이 뿌려졌다. 광주 제중원 회계직원이던 황상호는 3월 11일 자택에서 제중원 동료 홍덕주·장호조와 함께 제중원 등사기를 이용해 가명인 '황송우'를 사장 명의로 '조선독립광주신문' 1호 300부를 인쇄했다.

이 신문은 13일 광주 큰 장(광주교 부근), 광주시내, 제중원 등에서 시민들에게 배포됐다.

1호에는 만세시위 주요인물들이 총감부로 구인된 것, 한일 합방의 부당성 등을 지적하는 내용이 주로 담겼다. 특히, "조선이 일본과 동화될 수 없음은 밤낮으로 동화주의가 주입되어 온 저 관립여학교 생도들이 다른 자매를 대표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고 있음을 보아도 명백하지 않는가"라며 시민들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황상호 등은 이후 3월 14일, 15일 '조선독립광주신문' 2호 300부를 인쇄해 18일 광주 큰 장에 나가 배포했다.
광주기독교 병원 입구에 세워진 조선독립광주신문 제작지 표지석.

노 원장은 "조선독립광주신문은 전후 양면 2페이지에 불과했지만 서울의 소식을 전해주었을뿐 아니라 독립운동에 나서도록 분발을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며 "또 최초의 광주 신문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밝혔다.

조선독립광주신문 발행을 주도한 황상호는 1919년 5월 8일 광주 3·1혁명 관련 재판에서 3년의 실형을 받았다. '조선독립광주신문'의 원본은 1983년 목포 정명여고 선교사 사택 보수공사 도중 천장에서 발견됐다.

1917년대 광주 청년들의 비밀조직 신문잡지종람소는 1918년 삼합양조회로 이름을 바꾸고 1919년 2월에는 서울과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를 기획했다. 그러다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이 터지자 양림교회 교인들과 결합해 광주 3·10만세를 주도했다.

광주종람소 비밀조직은 5년 후 1921년 청년 항일공간인 흥학관으로, 다시 5년 후 1926년 광주학생 비밀조직인 성진회로 면면히 이어졌다. 그 장엄한 비밀결사의 흐름은 1980년 5·18까지 계승됐다.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 광주시 남구 구동 광주교 일원 (3·10만세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