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사리 뽑히면 안 돼요!”

고정국 2025. 7. 1.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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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125) 바랭이 · 2

베란다 사기토분에 눈에 익은 친구가 왔다
그 이름도 촌놈 같은 바랭이 그 친구가
"나도 좀 끼고 삽시다, 
왕년처럼 말이요!"

그래 어서 와라, 나도 잡초 시인이다
끈질긴 자생력에 온갖 꾸중을 마다 않고
끝끝내 민초의 뜻으로 
제 영토를 지키던
 
비 많은 우리 마을 우여곡절 많은 고장
시간당 오십 밀리 벼락천둥 치던 그 날
"쉽사리 뽑히면 안 돼요, 
맨 바닥을 지켜요!"

장마철 다 지나고 제 역할이 끝날 쯤에
알맞게 젖은 땅에 뽀득뽀득 뽑히는 목숨
잔뿌리 귀 익은 소리를  
가슴으로 들었지

그리고 하루 만에 지표면을 깔고 누워
반쯤 시들면서 문득문득 마른 풀 향기
어머니 아득한 체취를 
바랭이가 풍겼지.

/2013년 고정국 詩

#시작노트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은, 나에게 목동과 김매기의 계절이기도 했습니다. 시도 쓰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여름철 소나기가 막 지나 알맞게 젖은 토양에 자란 풀들을 뽑을 때 그 풀들의 "뽀드득 뽀드득" 토양 속에서 잘려 나오는 소리는 부드러우면서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는 귀로 듣지 않고 가슴으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 뽑혀 나온 바랭이포기들은 뙤약볕에 사십도가 넘는 이랑을 덮어주면서 곡식들 뿌리를 보호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면서 그 시들어 말라가는 바랭이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체험하지 못하는 '마른 풀 향기'가 어머니의 체취體臭로 다가오곤 했습니다. 

십여 년 전 노형동 우리 집 베란다 화분에 눈에 익은 잡초 한 포기가 발생했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랑 누나들과 함께 밭에 가서 잡초를 뽑으면서 정이 들었던 바랭이어서 한편 반갑기도 했습니다. 

베란다 화분에 자라면서 나에게 백 편이 넘는 시를 제공해주던 화초들 틈에 솟아오른 이 바랭이 어린 싹이 이제는 '민초'의 이름으로 나에게 다가와, 우여곡절 많은 이십일 세기 현대사의 언어로 시 한 편을 건네주고 있습니다. 시간 당 오십 밀리 벼락천둥 치던 그 날 "쉽사리 뽑히면 안 돼요, 맨 바닥을 지켜요!"라며.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