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협·세월호 부모가 만든 길…또 다른 유가족이 걷는다
‘우리 자식 죽음 헛되지 않게’ 헌신
유가협 부모세대 세상 떠날 시기
형제자매 세대도 초로의 나이로
민주유공자법 마지막 선물 되길
인권운동 과정 수많은 유가족 만나
6·25, 제주 4·3, 광주 5·18 유가족
죽음·감시·탄압 뚫고 끊임없이 증언
세월호 유가족도 진상규명 투쟁 치열
재난·산재 참사 유가족들 그 길 따라
침묵 않고 진실을 요구하는 힘 축적


지난 6월21일, 북한강변의 한 펜션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다. ‘청년유가협’ 모임이었다.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약칭)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 모임이다. 청년이라고 하지만, 60대 중반인 나도 회원이다. 마치 시골에 가면 60대도 청년으로 불리는 것처럼 유가협의 1세대인 부모님들이 볼 때는 아직 청년들이다.
열댓명의 회원 가운데 그날은 9명이 모였다. 공통점은 하나다. 민주화운동 과정 중에 형이나 오빠, 동생을 잃은 사람들이다. 모임에 참여한 ㄱ은 그날 환갑을 맞았다. 눈치 있는 동생 ㄴ이 커피를 주문하면서 작은 생일 케이크를 준비했다. 그의 환갑을 우리는 진심으로 축하했다. 21살에 그의 오빠는 서울 구로동 현장에서 구사대에 쫓겨 올라간 건물 옥상에서 몸에 불을 붙였다. 39년 동안 유가족으로 살아왔는데, 지금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수면제를 달고 산다.
ㄷ의 오빠는 위장취업을 해서 성남의 공단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 작은 회사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26살의 노동조합 위원장이 된 것이다. 그는 노동조합 파괴에 맞서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분신은 극단적인 선택이었지만, 그 시대에는 종종 있었다.
ㄴ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의문사 농성장에서다. 그의 형은 서울 신림동 자취방에서 의문의 전화 한통을 받고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형은 사흘 뒤에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돌덩이를 매단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부모님은 그때부터 진상 규명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아직도 의문사로 남아 있다. ㄴ이 의문사 농성을 하는 어머니를 찾아왔을 때 그는 초등학생이었다. 농성장의 ‘꼬맹이’로 불렸다.
유가족 동생들을 만났다
나는 유가족으로 그들과 만났다. 그들에게 오빠로, 형으로 불리면서 40년 가까운 세월을 만나고 있다. 부모님의 눈물과 한숨을 보면서 내 안의 슬픔을 말하지 못하고, 우는 부모님을 위로해야 했던 젊은 시절을 같이 보낸 형제이고, 누이들이다. 우리끼리 만나면 부모님 흉도 보고, 걱정도 하고, 그러다가 울기도 하고, 그러다가 서로 웃기도 했다. 서울 창신동에 자리한 유가협 활동 공간인 ‘한울삶’에 찾아든 그들과 나누었던 그 시절, 그때 우리는 젊디젊었다.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우리는 ㄴ이 카톡방에 남긴 것처럼 “같은 삶의 무늬를 가진 가족들이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은 부모님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그 “자체가 위로이자 행복”한 시간이었다. 청년유가협 회장은 나와 동갑내기 이석주다. 그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시기 거제도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때 최루탄에 맞아서 사망한 이석규의 형이다. 그는 말했다.
“이제 우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부모님들이 돌아가시고, 병중에 계시고, 유가협을 우리가 책임지고 맡아야 한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해서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는 지난 4년 동안 열네분의 유가협 부모님들이 돌아가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분들은 앞으로 얼마 못 사실 것이라는 것을. 지금도 여든을 훨씬 넘긴 장남수 회장(장현구 열사 부친)을 비롯한 부모님들이 천막을 지키는 게 너무 안쓰럽기만 하다. 그분들이 단식을 하고, 국회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면서 지난해 국회 본회의에서 민주유공자법을 통과시켰는데,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하루 만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민주유공자법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분들을 국가 차원에서 예우하자는 법이다. 유가족들에 대한 예우나 혜택, 지원은 최소화했다. 부모님들은 이제 몇분 안 남으셨고, 그나마도 대부분 연로하셔서 오래 사실 수 없다. 직계 가족인 자녀들에 대한 지원 항목도 있지만, 그런 혜택이나 지원을 받을 자녀가 거의 없다. 대부분 20대 청년 시절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국민의 힘이나 보수언론은 이를 극력 반대한다. 그들의 반대는 스스로 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세력임을 말하는 것과 같다. 지난겨울 우리는 계엄과 내란을 이기고 민주주의를 지켰다. 계엄과 내란세력이 민주유공자법을 반대한다.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선열들을 기리는 것처럼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지난겨울을 지나고 보니 민주유공자법의 제정이 더욱 절실해졌다. 자식을 잃고 ‘우리 자식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을 부단히 찾아 나섰던 분들이다. 그분들에게 민주유공자법을 마지막 선물로 안겨드리자, 그래야 그분들이 편히 눈감으실 거 아니냐는 이석주 회장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공감했다.
처음 만날 때는 초등학생이었고, 고등학생이었고, 20대 초반이었던 이들이었는데, 이제 막내가 40이 넘었다. 그 시절에 만났을 때 유가협 사무국장이었던 내게 물었다.
“우리 형은 왜 죽었어요?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오빠가 그렇게 독한 사람이었을까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다니….”
수많은 물음에 나라고 똑 부러진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도 묻고 있었다. ‘왜 너는 죽었냐? 그 길밖에 없었냐?’고. 아마도 내가 기울인 술잔의 7할 이상은 이런 고통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 탁 터놓고 말할 수도, 티도 낼 수도 없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갖고 살아온 유가족 인생이었다.

유가족의 말 경청하는 사회
어느 누구도 준비된 유가족은 없다. 유가협뿐만이 아니다. 나는 인권운동을 하면서 수많은 유가족들을 만났다. 한국전쟁 시기에 민간인 학살 희생자의 유가족들, 제주 4·3의 유가족들은 자신의 부모와 형제가 죽어갈 때조차 소리를 내어 울지 못했다고 했다.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아남은 이들은, 그러나 침묵만 하지 않았다. 자신이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알았지만, 끝내 그들은 말했고, 그들의 말은 가해자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꾸었다.
5·18 유가족들도 그랬다. 감시와 탄압을 뚫고 쉬지 않고 증언했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 결과로 5·18은 명예회복을 이루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죽음들이 있지만, 이만큼이라도 진실이 밝혀진 것은 유가족들이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용기는 살아남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이제 유가족들의 투쟁은 재난 참사 유가족으로, 산업재해 참사 유가족으로 번져간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투쟁은 당장은 성과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사회의 재난안전체계를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우연히 발생한 사고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고, 사건을 묻어두면 우리사회는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11년 동안 온몸으로 외치면서 세상에 알렸다. 세월호 유가족이 다른 재난 참사 유가족을 끌어안고 연대체(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만들어 내고, 그런 덕분에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위한 힘이 생겨났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만들어낸 길을 따라서 이태원 유가족들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유가족들이 움직인다. 새로운 길을 낸 것이다.
태안화력발전소의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이한빛 피디의 아버지 이용관 등의 유가족들은 한달 넘은 한겨울 단식농성을 통해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했다. 고통스러운 단식 끝에 얻어낸 답이다. 그분들은 흩어져 있던 산재 유가족들을 모았다(산업재해 피해자 가족 네트워크 ‘다시는’). 그들은 ‘내 자식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에서 기나긴 싸움을 시작했다. 온갖 비난과 혐오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이 길밖에 없다는 절박감이, ‘더 이상 내 자식과 같은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보편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유가족을 비롯한 피해자들이 아무 두려움 없이 말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는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 사람들의 증언은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우리 사회가 피해자의 고통에 더 공감해야 하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바로 나와 내 가족이 피해자가 되고, 유가족이 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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