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과 문경

경북도민일보 2025. 6. 3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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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에서 견훤(甄萱, 867~936)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한때 광주냐 상주냐를 놓고 학자 간에 공방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진주(광주의 옛 이름) 또는 완산주(전주의 옛 이름) 에서 주로 활동했으니 그런 주장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특히 목판본에 새겨진 광주의 광(光)자와 상주의 상(尙)자가 엇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의 학자가 상주 출생설(현재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을 신뢰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가 지렁이와 관계하여 견훤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렁이가 있던 금하굴이 바로 문경 가은 지역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설화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인물의 비범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되지만, 중요한 것은 견훤의 출생지가 문경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견훤이 지역적 기반을 다지고 세력을 확장하는 데 있어 문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삼국사기』본전(本傳)에는"견훤은 상주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함통(咸通) 8년(867) 정해에 태어났다. 본래의 성은 이 씨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지어 생활했는데 광계(光啓) 연간(885~887)에 사불성(沙弗城)을 웅거하며 스스로 장군이라고 일컬었다. 아들이 네 명이었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중에 견훤은 남보다 뛰어나고 지략이 많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견훤은 어릴 적 문경에서 아버지인 아자개 밑에서 자랐다. 아자개는 문경을 위시한 상주 일원의 호족으로, 견훤은 그의 밑에서 성장하며 무예를 익히고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을 다졌을 것이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훗날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고 신라를 위협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현재 가은읍 갈전리에는 견훤의 출생 설화와 관련되는 장소가 있으며 인근에는 소년 견훤이 성장기와 관련된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고향인 이곳에 사당(숭위전)을 건립해 문경시에서는 매년 향사를 올리고 있다.

879년(헌강왕 5)은 가은읍 원북리에 있는 구산선문 봉암사가 창건되던 해이다. 이때가 바로 견훤의 나이 13살 되던 해이다. 당시 봉암사 건립은 국가에서 추진하던 사업으로서 공사 감독관과 관계자들이 수도 경주에서 파견된 관리들이었다. 말 잘 타고 활을 잘 쏘던 소년 장수 견훤이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신라 군인으로 발탁되어 서남해 지역으로 가게 된 연유도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는 것이다.

문경은 예로부터 한반도 중부 내륙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계립령, 조령, 이화령 등 일찍부터 고갯길이 열렸고 방어와 공격에 모두 용이한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견훤은 이러한 문경의 전략적 중요성을 일찍이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문경을 통해 후백제의 북방 방어선을 구축하고, 신라와 고려의 진출을 견제하는 거점으로 활용했다.

실제로 견훤은 문경 일대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특히 신라 말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견훤은 문경을 기반으로 군사를 일으켜 주변 지역을 통합하고, 점차 세력을 넓혀 나갔다. 그의 활동은 문경 지역 주민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견훤의 이름은 문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징처럼 각인되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견훤의 고향옆 고사갈이성의 성주인 흥달이 견훤과 손을 잡지 않고 왕건과 손을 잡는 바람에 어쩌면 문경에 대한 반감을 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견훤에게 문경은 단순히 지나쳐가는 땅이 아니었다. 후삼국을 호령했던 웅대한 꿈을 품었던 그에게 문경은 전략적 요충지이자, 어쩌면 그의 삶과 가장 깊이 연결된 상징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문경과 견훤의 인연은 여러 측면에서 조명해 볼 수가 있겠다.

특히 봉암사가 건립되던 시기는 신라의 중앙 통치력이 약화되고 각지에서 호족 세력이 발흥하던 시기였다. 호족들은 새로운 사상적 기반을 찾고자 했고, 그 대안 중 하나가 선종(禪宗)이었다. 견훤 역시 선종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후백제 견훤 정권과 선승(禪僧)들 간의 관계가 활발했다. 특히 봉암사는 견훤의 출생지인 문경과 가까웠고, 희양산문의 선승들과 견훤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들을 통해 정치적 조언을 구하거나, 새로운 사상을 접하며 자신의 통치 이념을 정립했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견훤에 대해 모르는 사실이 너무 많다. 후백제라는 나라가 존립한 시기가 짧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문경의 산하 속에서 성장해 원대한 꿈을 꾸게 한 원동력이 이곳이었다는 사실 만큼은 기억해야겠다.

엄원식 문경시 가은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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