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으로 읽는 오늘] 쾌산원우(快山寃牛)와 여리박빙(如履薄氷)

강지영 목포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고전문학 박사 2025. 6. 30.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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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영 목포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고전문학 박사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글 중 쾌산원우(快山寃牛)라는 작품이 있다. 쾌산에 살던 농부가 밭을 갈다가 낮잠을 자게 된다. 농부가 잠든 사이 나타난 호랑이가 농부를 잡아먹으려 한다. 그를 본 농부의 소가 호랑이와 싸워 농부를 지켜낸다. 몸짓 큰 두 동물이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밭이 엉망이 되지 않을 리 없다. 치열한 사투 후, 호랑이는 물러가고 소는 난장이 된 밭을 지키고 있다. 단잠을 자다가 눈을 뜬 농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수라장이 된 밭이다. 농부는 밭에 뒹굴기라도 한 듯 흙투성이가 된 소를 보고 소가 밭을 망쳐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소를 죽여 버린다.

호랑이와 소가 싸울 때까지만 해도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까 궁금해 하였다. 그러다가 소가 급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는 극적인 전개가 나타나면서 밭이 망가진 게 소를 죽이기까지 할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망가진 밭은 시간을 들여 정리하면 되지만 죽은 소는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목숨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나서인지 이 이야기를 읽을 때면 농부가 소를 죽인 것은 어리석은 속단이며, 서사가 지나치게 비약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는 한다.

그런데 당대 사회에서 밭을 일구는 일이 생계를 이어가는 것과 맞닿아 있고 밭의 수확물이 농부의 목숨을 좌우하였다고 보면 그렇게 간단하게 받아들일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농부의 입장에서는 한 번 난장을 부린 소니 다음에도 그렇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또한 소가 한해 농사를 망쳐버렸으니 그 소는 농부에게 더 이상 쓸모도 없어졌을 것이다. 밭이 쑥대밭이 되어 일 년 농사가 허사로 돌아간 농부로서는 앞날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소를 죽이기까지 할 일이었나 하는 의문은 지울 수 없다. 사람 목숨을 부지하기도 쉽지 않기도 했던 시대였다고 하면 순간적으로 화가 솟구쳐 소를 죽인 농부를 매정하다고 몰아갈 수만은 없는 것도 같기도 하다.

농부의 선택에서 놀람과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된 이유를 찬찬히 짚어나간다. 억울함이라는 단어를 소환해 본다. 왜 억울함을 느꼈나 자문해 보고 나의 입장을 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알아챈다. 망가진 밭과 너저분해진 소.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 장면만 보면 소가 밭을 엉망으로 만든 게 맞다. 더구나 소는 인간의 말을 못하니 밭이 뒤집힌 사정도 전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농부가 추정해 풀어가야 하는, 농부의 인생 과제다.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너무도 명징하다. 밭을 망친 자가 소인 것이 분명한데 분노를 풀 길은 없다. 하지만 그 순간, 농부가 분노가 아닌 소가 그 밭을 일구기까지 내내 함께해 왔다는 것을 한 번 더 헤아려 보았더라도 그런 섣부른 판단을 내렸을까? 그렇지 않았을 수 있다. 호랑이가 밭으로 내려온 흔적이 어디엔가는 남아 있었을 것이며 소에게 남겨진 상처는 또 다른 해결의 단서를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찬찬히 헤아려 보았다면 자신을 구해준 고마운 소를 죽음으로 몰고 가 버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들이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지나치게 믿게 하는. 그런데 그와 같은 굳은 확신은 때로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두 번 생각하고 고려하기에 현대인은 물론 너무 바쁘다. 그리하여 분주한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확신의 딜레마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는 한다. 그리고는 후회를 거듭한다. 그 실수가 인정하고 넘어가 돌이킬 수 있는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애석하게도 세상에는 그러하지 못하는 실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단행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러해야 나를 살려준 애꿎은 소를 죽이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새로운 정비가 시작되고 있는 때, 시경(詩經)의 '살얼음을 걷듯이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리박빙(如履薄氷)의 마음을 떠올려 보아야 하지 않을까?